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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3년 7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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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코드 자동세차를 하는데 뒷자리에 틈이 있었는지 물이 좀 들어오면서 엄마에게 튀었나 보다. 눈간 네 농담은 재치 있었다. "차도 씻고 엄마도 씻었네. 차도 씻고 엄마도 씻었네. 차도 씻고, 엄마? 들었어?" 세 번이나 같은 말을 하는데 반응이 없는 엄마가 아빠도 답답했다. "어, 들었어." "그런데, 왜 안 웃어? 차도 씻고 엄마도 씻었다는 게 안 웃겨?" 가끔 네 엄마와 유머코드가 맞지 않아 힘들 때가 있단다. 그리고 아빠는 솔직히 웃겼다.
소망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매우 걱정되는 변수 한 가지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어. 선물과 관련된 문제잖아. 네가 착한 일도 많이 했지만 울기도 많이 울었기 때문에 선물 받기가 애매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짚었지. 당황할 줄 알았던 너는 꽤 침착했다. "내가 바라는 게 그렇게 큰 게 아니거든. 내년에 자전거 보조바퀴 떼고 타는 거 연습할 건데, 다치면 안 돼서 말이야. 그래서 보호장비…" 그 정도면 참 소박하다. 그 보호장비 어제 택배로 도착했더라.
고자질 네가 아빠와 복싱을 즐기는 이유야 뻔하다. 맞지는 않고 때릴 수만 있다면 싫어할 이유가 없지? 오늘도 수비 자세를 취하며 네 주먹에 적당히 당하다가 한 방 잘못 맞았다. 물론 7살 여자 아이 주먹이 다 거기서 거기지. 괜히 뒹굴며 엄살 한 번 피운 거야. "예지, 엄마한테 다 말해!" "에이, 고자질쟁이!" 순간 매우 부끄러워서 엄마에게 이를 수 없더구나.
동안 아래층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너에게 예쁘다고 칭찬한 것까지는 좋았다. 아저씨가 너에게 5살쯤 되냐고 물었던 게 신경이 좀 쓰였나 보구나. 두 분이 내리자 마자 눈을 깔면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에 뒤끝이 가득했다. "7살인데, 내년에 학교 가는데." 네가 동안이라서 그런가 보다.
야구 네가 지우개 두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설명하더구나. (지우개 한 개를 가리키며)"얘가 던져." (다른 지우개를 가리키며)"그리고 얘가 쳐." (치는 지우개를 던지는 지우개 주위로 한 바퀴 돌리면서)"이게 홈런이야. 아빠도 야구 알어?" 야구? 완전 좋아한다. 언젠가 야구장 한 번 같이 가자. 그리고 아는 거 얘기할 때 목소리 까는 것은 언제 봐도 맘에 든다. 설명도 깔끔했고.
취향 엄마 특파원(?)이 딸이 좋아하는 남자 아이가 바뀌었다고 전했다. 덩치 크고 착한 아이를 제치고 다른 녀석이 치고 올라왔다는구나. 엄마 특파원 취재로는 이번 신인(?)은 착하면서 조금 화도 낼 줄 아는 게 경쟁력이라고 했다. 조금 화를 낼 줄 아는 게 왜 경쟁력이지? 네 설명은 '든든해서'였다.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구나. 그나저나 덩치 크고 착하면서 화도 낼 줄 아는 남자는 네 엄마가 오래 전에 찾아낸 거 아니? 어쨌든, 여성 동지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도 하나 알게 됐다. 딸이 아빠를 바탕으로 수컷을 디자인한다는 점도.
포옹 엄마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던 네가 마지막 꼭대기 별 장식만 남겨두고 아빠를 찾았다. 안아달라고 부탁하기에 그냥 껴안아줬다. 프리허그 하는 것처럼 꼬옥. 너는 자지러지며 웃다가 가까스로 들어서 올려달라고 다시 부탁하더구나. 이번에는 트리를 등지게 번쩍 안아올렸다. 다시 꺽꺽 웃으며 넘어가는 모습이 좋더구나. 장난이 심했니? 그래도 그런 모습이 보고 싶었단다.
약속 점심으로 먹고 싶은 것을 물었더니 또 '라면'이었다. 마침 소고기국이 있으니 점심 때 밥을 먹고 라면은 나중에 간식으로 먹자고 제안했지. 뜻밖에도 너는 순순하게 받아들이더구나. 오후에 다시 외식하자고 제안했지. 외식 자체도 좋지만 라면 약속을 잊게 하려는 뜻도 있었단다. 너는 어김없이 약속을 상기시키더구나. 일단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어. "곧 외식할 것이고, 지금 라면 먹으면 배가 부를 것이고, 배 부르면 맛있는 것을 먹기 어려울 것이고." "아빠, 아빠 말 알겠고 맞는 말인데 약속했잖아." 아주 단호하더구나. 라면이 입맛에 맞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