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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5년 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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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엄마가 영화를 예약했더구나. 예전에 네가 잠들기 전에 아빠가 읽어줬던 책 가운데 하나였지. "예지, 아빠가 옛날에 너 잠들기 전에 읽어줬던 거 기억나?""응, 기억나. 아빠, 아빠가 책 읽어주면서 먼저 잠들었던 거 기억나?" 기억나지 않았단다.
외박 집에 들어오니 없더구나. 외할머니 집에서 자겠다고 했다면서. 네가 태어나고 나서 너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한 게 처음이란다. 고맙다.
궁합(?) "아빠, 하나 둘 셋 하면 김치와 단무지 중에 하나 말해 봐. 하나 둘 셋!""김치!" 우리는 동시에 김치를 외쳤지. 똑같다며 배시시 웃는 얼굴이 좋더라. 하나로는 검증(?)이 어려웠는지 몇 개를 더 제시하더구나. △연필 - 지우개 △책 - 종합장 △의자 - 책상 △수첩 - 공책 △치약 - 치솔 △짬뽕 - 짜장 연필, 책, 의자, 수첩, 치약 그리고 짜장이었잖아. 아빠는 100% 너와 똑같은 답을 했고. 솔직히 연필까지는 재수였어. 일단 네가 먼저 말한 단어를 말하는 패턴을 금방 파악했다. 그 뒤로는 뭐 크게 어렵지 않았지. 짜장은 어떻게 맞췄을까? 네가 짬뽕보다 짜장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어. "아빠, 우리는 찰떡궁합이에요!" 그래, 인정한다.
캐럴(2) 책상에서 뉴스를 검색하는 아빠 앞에 딱 마주앉더니 이렇게 말했지. "아빠, 내가 캐롤집이라는 것을 만들었어." 손에 든 수첩에는 가사가 깨알같이 적혀 있더구나. 너를 9년 동안 겪은 아빠는 앞으로 이어질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어. 아니나 다를까. 화이트 크리스마스 - 루돌프 사슴코 - 징글벨 - 울면 안 돼 등 네 곡을 풀로 땡기더구나. 아직 크리스마스는 한참 남았잖아!
성장3 책상 위에 올라간 하늘이(고양이)를 들고 내려놓는 게 예전보다 확실히 버거워 보이더라. 그러고 보니 하늘이 덩치가 처음 집에 왔을 때보다 두 배는 커 보이네. 이제 무거워서 한손으로 못 들겠다는 말에 과장은 없다. "아빠, 책상에 막 올라오구요. 이제 힘도 세서 연필꽂이도 다리로 밀고요. 책도 떨어뜨리고 막 덤비고 그리고 아빠, 내 어렸을 때도 크는 게 겁났어요?""응, 지금도!""헤~." 그러니까 그 웃는 표정 앞에서는 못 버티겠단다.
캐럴 "아빠, 이 노래 알아? 꿈 속에서 본 화이트…" 너무 잘 아는 노래란다. 그것도 영어로. 중학교 때인가? 실기시험 쳤거든. 자랑할 게 많지 않은 처지라서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지. "아임 드리밍 오브 어 와잇 크리스마스…" '와잇' 봤니? '화이트' 이러면 없어 보이거든. 밝은 표정으로 손뼉을 치는 너를 보며 이번에도 오디션(?)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구나." 혼잣말인듯 혼잣말 아닌 혼잣말 같은 말을 듣고 갑자기 궁금했단다. 노래가 궁금했던 거 맞니?
여인의 향기 피아노 음악에 맞춰 화면을 터치하는 아이패드 게임에 요즘 빠졌더구나. 날라다니는 손가락에 감탄하고 있다. 이거 아느냐며 연주한 곡이 영화 탱고 장면에 깔리는 곡이네. 당연히 잘 알지! 유튜브에서 검색해 탱고 장면을 보여줬잖아. 뚫어져라 보던 네가 감탄하더구나. 당연하지. 엄마와 저렇게 춤 출 수 있을까? 왜? 우습니?
자랑 시험 점수 좀 잘 받았다고 점수 못 받은 친구 놀리는 애들이 있었다며? 고작 그런 거 자랑거리로 만든 어른 잘못이다. 자기가 더 가진 것으로 남을 돕지도 못하면서 자랑만 하는 것은 그냥 바보란다. 정말 자랑할 게 별로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여튼 못난 짓이야. "아빠가 예지와 엄마보다 힘이 세면 무거운 것을 들어주면 되잖아. 그러면 당연히 아빠 힘이 세다는 것을 알 테고. 그런데 무거운 것을 들지는 않고 힘 세다고 자랑만 하면 어떻겠어?""진짜 우스울 것 같아. 그러지 마." 그래, 우스운 거다. 미련한 거고 없어 보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