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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

(22)
미지(未知) 하루 중 가족과 부대끼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자는 시간을 빼면 기껏 3시간 정도 될까? 하루 대부분은 외로움을 벗삼아야 하지. 전에도 얘기했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안다고 한없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잠깐 마주칠 때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소 민망한 모습으로 뒹굴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이면에는 이런 적적함이 깔려 있어. 아빠 양반 감수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지? 세상은 보이는 영역보다 보이지 않는 영역이 훨씬 방대해. 아빠 양반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앞으로도 이해할 리는 없고, 그런 영역이 있다는 것만 인식해도 훨씬 성숙해질 수 있을 거야.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야옹.
성차별 "안 추워?" 밤에 티셔츠 한 장 달랑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온 아빠가 없어 보였니? 아빠는 그렇게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란다. 쌀쌀한 기운을 약간 즐기기도 하고. “강한 남자라서 괜찮아.”“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야.”“왜?”“남자니까 어떻고 여자니까 어떻고 하는 것은 성차별적 발언이야.” 네 지적이 더 오싹했단다.
자존 언젠가 아빠 양반이 자기 어깨 높이까지 내가 도약하자 깜짝 놀라더군. 진심으로 감탄하는 모습을 보고 좀 뿌듯했지. 이처럼 고양이는 스스로 갈고 닦은 재능으로 인정받아. 자기 증명을 위해 자신을 과장하거나 다른 동물을 깎아내리지 않지. 자기 나무 자랑하고 싶어서 주변 나무를 잘라내는 존재는 내가 알기로는 인간 뿐이야. 그냥 자기 나무를 더 성의 있게 키우면 되잖아. 아빠 양반, 뭔 말인지 알겠어? 야옹.
인정 소싯적 누나 꼬맹이를 할퀴었을 때 아빠 양반이 집어던진 쿠션을 본능적으로 피하면서 깨달았어. 인간은 감히 고양이를 응징할 수 없다는 것을. 아빠 양반은 ‘저걸 때릴 수도 없고’라며 씩씩거렸지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지. 내 세상을 만끽하며 인간 위에 군림하려는 순간 아빠 양반이 장비한 무기가 바로 물뿌리개야. 찍찍 나오는 물을 미간에 맞으면 진짜 못 견디겠더라고. 아빠 양반은 공익근무했다면서 나를 저격하는 솜씨 하나는 일품이야. 어쨌든 상대를 인정할 줄 아는 고양이 품성을 아빠 양반도 배워야 할 텐데. 야옹.
행복2 인간들이 그토록 떠벌이는 행복이라는 게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누릴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 조건을 채울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행복은 개체를 둘러싼 모든 부조리가 사라지면 생기는 결과물이 아니야. 어떤 부조리와 맞서도 견뎌낼 수 있는 기초체력 같은 거지. 아빠 양반, 혹시 아시나? 아파트 위·아래층 통틀어서 아침·저녁 음식 만드는 냄새 나는 곳은 우리집뿐이야. 몰랐지? 야옹.
도전 영역 동물인 고양이에게 갈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야. 아빠 양반이 내 털로 말미암은 알레르기 때문에 천식을 앓으면서 이 집에서 침실은 드나들 수 없는 유일한 곳이 됐지. 물론 불굴의 고양이로서 부끄럽지 않은 도전은 늘 있었어. 하지만, 아빠 양반도 만만찮더군. 문고리도 바꾸고 열쇠도 채우고. 그래도 아빠 양반, 도전 의지조차 꺾는 바퀴 달린 큰 가방은 너무했어. 정당한 요구를 차벽으로 가로막던 위정자와 다른 게 뭐야? 그러면서 맨날 민주주의는 무슨. 야옹.
지식 한 종족 안에서 지식이 많은 자가 지녀야 할 미덕은 희생이야. 대부분 동물 무리 안에서 의심 없이 지켜지는 원칙이지. 희생하는 지적 존재가 무리 안에서 받는 대가는 존중이고. 그런 점에서 그저 군림하고자 철부지 때부터 머리에 지식을 쑤셔넣는 인간은 참 흥미로운 존재야. 아빠 양반, 책을 읽어서 얻고자 하는 게 뭐야? 늘 고민하라고. 야옹.
간섭 감각이 닿는 모든 것에 개입해야 한다면 고양이는 아마 미쳐버릴 거야. 고양이는 인간보다 훨씬 멀리 보고 더 작은 소리도 들어. 서랍 깊숙이 숨겨 둔 간식 냄새도 늘 맡고 촉각 또한 예민하지. 아빠 양반이 방에서 전화 통화를 하면 거실 끝에서도 상대 목소리까지 들려. 저 양반 또 술 약속 잡고 있네 으이구. 그러니까 이 모든 것에 간섭할 수도 없거니와 간섭하지 않는 게 맞기도 해. 아빠 양반, 때로는 그 어설픈 감각에 뭔가 얻어걸리고 거슬리더라도 풍경처럼 받아들여. 세상 일이 자기 범주 안에서만 돌아갈 리 없잖아? 그래서도 안 되고.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