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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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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파시 탁구장에 간 네가 집에 올 시간이 되자 엄마가 휴대전화를 들더구나. 안방에서 TV를 보면서도 말이다. 잊지 마라. 네가 앞으로 몇살을 더 먹든 엄마 눈에는 그저 아기란다. “예지, 어디야?”“엄마, 나 집이야.”“집? 예지야, 집 어디야?” 방문이 벌컥 열리며 네가 얼굴을 빼꼼 내밀더구나. 모녀 사이 2% 부족한 텔레파시조차 살짝 부러웠단다.
마술 카드 한 벌을 반으로 나눠 고르게 했잖아. 고른 카드를 다시 4등분 해 식탁에 놓더구나. 가장 위에 있는 카드가 모두 에이스라서 깜짝 놀랐단다. 자신감이 붙은 너는 카드 한 장을 고르라더니 다시 섞은 뒤 한 장을 내밀었지. “이거?”“아니.” 흠칫한 너는 카드를 펼치더니 두 장을 꺼내더구나. “둘 중에 하나?”“아닌데.” 카드를 막 섞은 너는 침착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구나. “아빠, 다시 골라.”“왜?”“실패했거든.” 더없이 쿨한 태도가 더 마술 같았단다.
탁구 일주일에 두 번 배우는 탁구에 재미를 붙여 다행이다. 처음에는 날아오는 공에 라켓을 대는 것도 버거워하더니 조금씩 요령이 붙나 보더구나. "이제는 그냥 제자리에서 치는 게 아니라 좌우로 움직이면서 치기 시작했어요." 좌우로 폴짝폴짝 뛰며 팔을 휘두르는 모습이 뭐랄까. 아주 다이나믹한 설명과 달리 꽤 정적이었으며 어떤 긴장감을 느끼기는 좀 어려웠단다. 점점 늘겠지 뭐.
고정관념 감기 기운이 있는 네가 약국에서 기어이 검은색 단색 마스크를 골랐다며? 무슨 유행인가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서 한 친구가 ‘연예인병’이냐며 비꼬았다고? 네 반격이 매서웠더구나. “그거 고정관념 아니야?” 친구라고 가만 있었겠니? 그랬다면 시작조차 않았겠지. “요즘 연예인들 다 그거 끼고 다니던데.” 이미 물러설 단계를 넘어선 상황에서 네 재반격이 궁금했다. “그게 네 고정관념이라고.” 친구 처지에서 참 밉상이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단다.
기대 “주말에 마늘 까야겠네. 간마늘이 다 떨어졌어.” 은근슬쩍 주말 작업량을 툭 던지는 것은 엄마 감독 장기란다. 마침 아빠 앞에는 우리집 일꾼 꿈나무가 앉아 있었지. “이번 주말 예지에게 기대가 커.”“왜?”“마늘 야무지게 잘 까잖아.”“내가 좀 하기는 하지.” 씨익 웃는 얼굴에 담긴 자신감이 참 미덥더구나. 한발 빼도 될성 싶었다. “아빠에게도 기대가 커.”“왜?”“얼마나 엄마를 위하나 볼 수 있잖아.” 속으로 죽어라고 까야겠다 복창했단다.
동시 학교 숙제로 쓴 동시 잘 읽었다. 외할머니를 향한 애틋한 사랑과 고마움, 자본주의에 종속된 어린이 삶이 잘 녹아 있더구나. 우리 할머니 - 이예지 학교 갔다와서 힘들면쪼르르 달려가는사우나따뜻하게 해 주고마실 것 챙겨주고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눠주는안방 사우나 모두 다 공짜 배 고플 때터덜터덜 찾아가는식당다양한 음식가리지 않고다 맛있는안방 식당 무조건 공짜
유소년 마트에서 야구 글러브를 한참 보고 있기에 의아했다. 이런 게 네 흥미를 끌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든. “왜? 글러브 가지고 싶어?”“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왜 유소년 글러브야? 유소녀는 야구 안 해?” 아주 날카롭고 타당한 지적이다. 언젠가 ‘유소년 체육관’ 얘기를 들을 때부터 그런 문제의식(?)을 품었다니 대견하구나. 유소년·유소녀 쓰지 말고 ‘어린이’로 바꾸면 좋겠다는 대안도 훌륭했다. 대안 없이 지르고 보는 어른도 많거든.
김영란법 어쩌다가 집에 빼빼로를 좀 쌓아두게 됐네. 학교에 몇통 들고 갔다고? 친구들과 잘 나눠 먹었다니 좋구나. 그런데 선생님은? “선생님은 주고 싶었는데 못 줬어.” “왜?” “김영란법 때문에. 선생님이 아예 안 받아.” 그 법 주먹만큼이나 가깝구나. 마음 대로 줄 수 없는 섭섭함 잘 알겠다만 세상이 더 나아지는 과정이라 믿고 이해하자. 이제 선생님 주려고 했던 거 어서 내놓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