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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4년 8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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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 엄마가 너에게 먹이고 싶지 않은 음식과 네가 먹고 싶은 음식 목록이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거 아니? 일요일 점심을 '된장라면'으로 떼운 네가 "칼칼하니 맛있었어"라고 했잖아. 아빠야 뭐 '칼칼한 맛'도 아는 게 대견하더라.
둘다 네가 짜장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당연히 두 개는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짜장라면은 한 개뿐이고 그냥 라면이 몇 개 있더구나. 먼저 짜장라면을 끓여서 너에게 내놓고 라면 하나를 다시 끓였지. 아빠도 먹어야 하니까. 그냥 라면도 포기하기 어려웠는지 같이 나눠 먹자고 협상 들어오더라. 아빠가 짜장라면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게 명분이었지. 어쨌든 그렇게 합의하고 라면을 끓였잖아. 그런데, 라면 하나 끓이는 몇 분 동안 짜장라면 그릇에 바닥이 보였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지. "예지, 나눠 먹기로 했잖아.""어, 덜 그릇이 없어서…." 답이 그럴듯했단다. 태연하게 라면도 먹겠다더구나. 그래, 다 먹어라.
공연 유치원 졸업 공연 잘 봤다. 매니저 역할도 충실한 엄마가 네 얼굴에 분칠도 해줬더구나. 하지만, 출연자 5명 가운데 유일하게 너만 눈을 가리는 가면을 썼지. 부엉이 역할이라나? 장한 맺음과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
플루 플루로 시달리던 네가 거의 회복 단계라 다행이다. 외출은 무리지만 집에서 놀게 없나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니 괜찮은 듯하더구나. 네 수발을 들던 엄마는 결국 뻗었단다. 이런 계주는 늘 자연스럽지. 뻗어 있는 너에게 엄마 만한 아군은 없어. 하지만, 엄마가 뻗었을 때 너 만한 적군도 없지 싶다. 그러니까 아프지 않는 게 서로 돕는 거란다.
잔소리 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강아지와 놀던 네가 신을 신을 채로 무릎으로 기어서 방으로 들어오더구나. 이런 건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더라. 엄마는 당장 신을 벗으라고 했고, 너는 궁시렁거리며 신을 벗었다. 볼일을 보고 나가면서 방 안에서 신을 신으려는 너를 이번에는 아빠가 제지했지. 자상하게 신을 들고 나가서 신으라고 권했잖아. 그러자 신을 든 채 밖으로 나가던 네가 문을 닫으면서 한마디 남기더구나. "잔소리쟁이들!" 잔소리 안 듣고 살기로는 대한민국 상위 5%인데 말이다.
순위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늘 궁금하지만, 너는 엄마와 아빠가 뭘 좋아한다고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더구나. 그래서 물어봤어. "엄마는 홈쇼핑, 포코팡(휴대전화 게임?), 카톡, 예쁜 옷 입는 거. 아빠? TV로 영화 보는 거, 나, 엄마 그리고 음악?" 다른 것은 모르겠고, 네 엄마가 홈쇼핑과 포코팡 사이에 아빠를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
역지사지2 갑자기 먼 길 떠날 일이 생겼다. 친척 할아버지 한 분이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해서 말이야. 차를 타고 30분쯤 지났을까? 너는 몸을 이리저리 꼬면서 도착했느냐고 묻더라. 도착 예정 시각이 3시간 넘게 남았는데. 엄마는 한참 남았다고 답하더구나. 너는 귓속말로 아빠가 운전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알겠다고 말했다면서. 참 기특했다. 물론, 왕복 7시간 동안 그 깨우침이 바탕이 된 말이나 행동은 전혀 없었지. 그래도 내 고통을 통해 상대 아픔을 아는 척하는 것도 괜찮다.
걱정 엄마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네 말빨이 많이 세졌더구나. 조금 부담스럽더라. 너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엄마가 갑자기 아빠에게 할 말이 생각났는지 대화 대상을 옮겼잖아.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너는 쪼로록 엄마에게 다가위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면서. "엄마, 나와 싸웠다고 아빠하고만 친하기 있기, 없기?" 평소에 잘하거라 이것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