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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2년 6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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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 출장 간 곳에 폭설이 내려 꼼짝없이 갇히게 됐다. 이 같은 상황을 전해야 했기에 전화했는데 엄마가 너에게 휴대전화를 넘기더구나. "눈이 많이 오는데 어쩌지?" "어쩌기는, 나가서 신나게 놀아야지." 차마 그럴 수는 없었지만 네가 백 번 옳다.
나쁜 남자 유치원에서 7살 오빠들이 괴롭혔다고? 우선 네 대응이 궁금했다. "나도 7살 되니까 그러지 말라고 했어." 잘 대응했다. 그런데 같은 반에 힘센 친구 한 명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땠을까 싶었다. "안 돼. 걔는 너무 착해." 여성 동지들이 나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단다.
대선(2012년) 너는 원칙과 상식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라. 그것은 당연히 딛고 버틸 땅이지 애써야만 따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다.
해결책 뉴질랜드로 출장 간 엄마가 그리운 게 당연하지. 장난감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내고 시비 걸어도 이해했다. 그래도 방치할 수는 없었지. "짜증나는 이유를 모르겠어." 훌쩍거리는 너에게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 지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아빠, 기분 좋았을 때를 떠올리면 금방 기분이 좋아져." "기분 좋았을 때? 어떤 때?" "엄마, 아빠한테 선물받았을 때."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더구나.
본심 TV 영화 채널을 한참 보는데 스윽 다가오는 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아빠, 그게 재밌어?" "응, 재밌어." "난 EBS랑 KBS키즈가 재밌어." 리모콘을 넘겨야겠더구나. 그나저나 처음부터 EBS나 KBS키즈 보고 싶다고 말하면 안 되겠니? 대화 스타일이 엄마더라.
추억 가지고 놀지 않은 채 쌓이기만 하는 장난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너에게 상자를 주며 필요 없는 것과 부서진 장난감을 골라내라 했지. 한 시간 정도 신중하게 검토하던 너는 플라스틱 그릇 하나, 작은 탬버린, 용도를 알 수 없는 부서진 장난감 등 딱 3개만 내놓더구나. 대충 봐도 50개는 넘게 버려야겠던데 말이다. 너는 이 장난감은 누구와 함께 갖고 놀았고, 이 장남감은 누가 사줬고, 이 장난감은 누구에게 얻었고 한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저마다 사연 없는 장난감은 없더라. 아빠가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구나. 그래도 다음에 한 번은 제대로 정리하자.
더더더 네 애정 표현이 점점 거창해지는구나. 아빠 처지에서 나쁠 게 없지. 다만, '하늘만큼'으로 시작해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우주보다 더' 이후에 더 나올 게 있는지는 궁금했다. "아빠, 내가 엄마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 "글쎄." "아빠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나저나 그 표현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위로 엄마 나이는 알겠는데 아빠는 몇 살이냐며 갑자기 물어서 놀랐다. 느닷없이 호적을 까라니 말이다. "어? 엄마보다 적네. 그래도 아빠가 키도 크고 힘도 세잖아. 나이가 적다고 마음이 작은 것도 아니고." 공감한다. 단지 왜 그런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