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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2년 6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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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연기2 엄마가 밥 먹자는데 아이패드 하겠다는 네가 살짝 괘씸했단다. 아이패드도 중요하지만 밥 먹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빠로서 당연했지. 순순히 자리에 앉은 너는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빈 그릇을 내밀더구나. 혀 짧은 소리로 다 먹었다면서 말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칭찬 아니겠니. '흠칫 놀라며' 같은 지문을 소화하는 것은 오롯이 아빠 몫이다. (흠칫 놀라며)"진짜 대단하네. 7살 언니 같네." 아빠 배역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명연기 외할머니 집에서 자는 너를 안고 집으로 가는데 그날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단다. 너를 껴안고, 우산 들고, 아빠 가방 들고, 네 가방도 들었지.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너에게 괜찮냐고 물었던 것은 궁금하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걸었으면 하는 바람도 섞였어. 엘리베이터 거울에 아빠 어깨 너머 말똥말똥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가 보이더구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걷지 않겠느냐고 물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더라. 다시 거울을 보니 너는 미간에 약간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을 질끈 감았더구나. 결국, 침대까지 안고 가서 눕힐 수밖에 없었다.
원작 한동안 네가 읽어달라며 들고온 책은 십중팔구 였다. 왕비가 거울에게 묻는 대목에서 느닷없이 질문을 던진 것은 그냥 읽기만 하는 게 지겨웠기 때문이었어. "거울이 뭐라고 대답했을까? 아빠 생각에는 이예지라고 했을 것 같은데.""아빠, 주인공이 백설공주니까 백설공주라고 해야 맞는 거야." 면박은 예상하지 못했단다. 그나저나 자신 있게 얘기할 때 목소리 까는 것은 누구에게 배웠니?
무남독녀 흰색 구두, 분홍색 구두, 빨간색 털신, 분홍색 구두, 연분홍색 구두, 흰색 구두, 흰색 바탕에 분홍색 줄무늬 구두, 분홍색 장화, 흰색 구두. 누가 봐도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가정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챌 수 있는 현관이다. 단지 우리집에 딸이 하나뿐이라는 사실만 이상할 뿐이지.
개그 물론 거실에 널브러진 인형을 아빠가 치워도 된다. 하지만, 네가 잘 노는 것만큼 잘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지. "예지야, 인형 치우자.""알겠습니다~람쥐." 회사 후배들이 할 때는 가소로웠는데 아주 재밌는 개그였구나. 후배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겠다.
편애 식당에서 엄마는 너와 함께 먹겠다며 된장찌개를 시켰다. 아빠는 비빔냉면과 우리가 함께 먹을 만두 한 접시를 시켰다. 엄마는 끈적한 눈길을 한참 냉면에 보내더니 결국 한 젓가락 가져가더구나. 그래도 아쉬워 보여 아빠는 한 젓가락을 더 권했다. 접시를 내밀며 흐뭇해 하는 엄마 표정 봤니? "아빠는 엄마만 사랑해?" 아빠 입으로 들어가던 냉면을 어색하지 않게 네 밥그릇 위에 올린 것은 순발력이었다. 이 자리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지. 엄마와 너는 하나 시켜서 나눠먹을 시기가 지났다는 것, 네가 사랑은 물질로 증명한다는 것을 알아챘다는 것.
후유증 유치원 운동회, 바로 이어진 어린이날 주요 행사 등 대선 후보급 일정을 소화한 너는 결국 구토와 고열에 시달리며 응급실로 향했다. 밤새 너에게 시달리던 엄마도 마침내 침대에서 뻗더구나. 열이 내리지 않은 너는 그래도 거실에서 늘어져 를 시청하는 집념을 보여줬다. 아빠는 너와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시 출근하는 비서관 일정을 차질없이 진행했지. 아플 때마다 느끼겠지만 건강이 최고다.
택배 갑자기 앞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호기심이 발동했나 보구나. 무슨 소리냐고 묻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아빠라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잖아. "글쎄, 손님이 왔나?" "손님? 택배?" 어쩌다가 손님이 곧 택배가 됐는지는 엄마가 잘 알겠지. 며칠 전 홈쇼핑 채널에 집중하며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뭔가 마뜩찮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