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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6년 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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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행시 to 10살 이예지 양 엄마 탄신일을 맞아 외식을 하는 자리에서 수줍게 카드를 내미는 모습이 참 예뻤단다. '선물은 잘 모르겠지만 카드는 꼭 써드리고 싶었어요'라는 표현에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더라. 그래도 역시 돋보이는 것은 엄마 이름으로 지은 삼행시였어. 정 : 정말 정말 사랑하는 우리 엄마순 : 순간 순간이 행복해요영 : 영원히 사랑해요 엄마는 마치 이 순간 때문에 40여년 동안 이 이름을 쓴 사람처럼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더구나. 물론 아빠는 '상품권과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콤보'가 네 말빨에 나가리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만. 그래도 좋았단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어른들 to 10살 이예지 양 "아빠, 오늘 엄마 생일인데 알아? 난 카드 썼어.""아빠는 카드 같은 거 안 써.""왜?" 백화점 상품권을 받은 엄마 표정 봤니? 어른들이 다 그렇단다. 후훗.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부재중 to 10살 이예지 양 "엄마, 엄마도 아빠가 집에 안 들어오는 날에 보고싶어요?" 딸아. 그런 돌직구를 밥상 앞에서 느닷없이 던지면 아빠가 힘들단다. "당연히 보고싶지. 예지는?""나도. 나 아빠 보고 싶어서 운 적도 있잖아." 일단 한숨 돌리고, 그나저나 아빠 보고 싶어서 운 적도 있다고? 엄마 없을 때만 우는 줄 알았더니. "예지, 아빠 보고 싶어서 운 적이 있다고? 한 번도 본 적 없는데.""참나, 아빠 없을 때니까요!" 아! 그렇구나.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투쟁 to 10살 이예지 양 금요일 야근, 토요일 휴일근로가 예정된 엄마 스케쥴을 확인한 너는 일갈하더구나. "아빠, 아무리 생각해도 휴일에 회사 가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옳다! 노동자 권리에 예민하구나. 기특하다. 당장 너와 함께 엄마 회사 앞에서 '엄마를 돌려달라'는 투쟁을 전개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영원히 돌려줄까봐 말이다. 흠흠.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어부지리 to 10살 이예지 양 집에 마땅히 먹을 것도 없고, 아빠가 상차릴 여력도 없더구나. 배달 음식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지. 그러고 보니 너와 먹을 수 있는 배달 음식이라고 해야 피자나 치킨 정도잖아. "아빠, 피자나 치킨 말고 다른 거 뭐 없을까?" 그러게 말이다. 배달 목록을 뒤져 보니 횟집 전화번호가 있기는 하더구나. 네 의사를 묻기는 했다만 별로 기대는 없었단다. 그런데 '엄지 척'이라니. "아빠, 괜히 나 때문에 회 시키는 거 아냐?""아니, 예지 먹고 싶으면 아빠는 아무 거나 괜찮아." 그리고 '너 때문에 괜히'라면 '중(中)'을 시키지 않았겠지. 마침 도수 높은 고급진 증류 소주도 남았고 말이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직언 to 10살 이예지 양 엄마가 야심차게 준비한 김무침이… 그래, 웬만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엄마가 인정하더라. 짰다. 그래도 첫 시도니 너그럽게 먹자꾸나. 이럴 때 한 번 참아야 일상이 편한 법이란다. 더군다나 첫 시도라고 하지 않니? "엄마, 레시피 대로 안 했어?""했어. 간장을 조금 많이 넣었나 봐.""티스푼으로 한 스푼? 두 스푼?""아니, 그냥 감으로 했어." 딱 이정도 대화에서 끝났으면 무난하겠다고 생각했단다. "TV에서 쉐프들도 감으로 양념을 넣던데, 맛있던데." 한마디 박아놓더구나. 물론 곧 "엄마가 요리를 못한다는 뜻은 아니야"라고 쉴드친 것은 아주 훌륭한 감각이었다. 여튼, 이유는 잘 모르겠다만 네 직언에 청량감을 느꼈단다. 물론 아빠가 엄마에게 직언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
그때는 to 10살 이예지 양 네 아기 때 얘기를 하던 엄마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휴대전화에 저장해놓은 동영상을 틀더구나. 5~6살즈음 네 공연(?)이 무척 반가웠단다. 함께 보던 너도 아주 재밌어했지. "아빠, 귀여워요." 아, 그래 됐고. 엄마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벌레하면서 눈은 초승달을 만든 채 입을 다물지 못하더구나. 그나저나 동영상을 보며 아빠는 좀처럼 한 가지 궁금증을 털어내지 못했어. 결국 엄마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예지 발음이... 동영상보다 훨씬 정확하지 않았나?" 엄마가 꺽꺽 넘어가면서 말하더구나. "그러… ㅋㅋㅋ 게… 전에 ㅋㅋㅋ …는 ㅋㅋ… 귀에 쏙쏙…ㅋㅋ …들어왔는데." 동영상에서 너는 무슨 노래인지 어버버버... 그래도 대충 알아듣기는 했다만. from 자애롭고..
이세돌 to 10살 이예지 양 지난 1월이었나? 제주도 갔을 때 호텔 복도에서 마주친 아저씨 기억나니? 아빠가 엄청 반가워했잖아. 그러나 정작 그 아저씨는 쭈뼛쭈뼛 쑥쓰러워했지. "아빠, 아빠랑 엄청 친한 사람인 줄 알았어." 그 아저씨 이름이 이세돌이란다. 최근 1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 오늘 인공지능과 바둑을 뒀는데 졌네. 뭐랄까. 이런 일이 아빠가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바둑 따위는 관심조차 없는 네가 한참 나이 먹었을 때나 가능할까 싶었는데 좀 먹먹하네. 간만에 컴퓨터(인공지능)를 '스타크래프트'로 밟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빠가 사람에게는 못 이겨도 컴퓨터에게는 이기거든. 인류 자존심 좀 세워주려고.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