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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재발견 AS

[경남의 재발견]감정 억누르기

<삼국지> 초반에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벤트 장소가 복숭아 나무 아래니 '도원결의'가 됩니다. 여기서 수컷들을 자극하는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 태어난 날은 다르나 한날 한시에 죽도록…


어렸을 때는 그 대사가 꽤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멘트에 조금도 감흥이 없습니다.



아~ 뽀대 작렬! 간지 좔좔!


거창 신원면에 가면 태어난 날은 제각각이나 죽은 날은 같은 사람들이 수백명 있습니다. '거창사건 희생자'입니다. 거창을 취재하고 나서 거창 이야기는 무조건 '거창사건'으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하면 거창 취재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감정 조절이었습니다. 비참하고 처절하고 애절하고 잔혹하고 원망스러운 이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가야할지 영 막막했습니다.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박민국 기자


막연하게 취재 때 찍은 사진을 넘기는데 거창사건추모공원에서 찍은 비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육면체 한 면을 사선으로 깎은 검은 비석, 거기에 새긴 태어난 날짜와 죽은 날짜. 더도 덜도 말고 이 장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훼손된 박산골 합동묘소 비석. /박민국 기자


어쨌든, 취재 과정에서 대상을 향한 감정이 지나치게 솟을 때가 있습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입니다. 그 감정에 쏠려 막 정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보면 지나친 감정 개입은 뜻을 전할 때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래서 원고 마감 때 상당 시간은 그 수위를 조절하는 작업에 쏠리게 됩니다. 이 과정도 늘 버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