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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4년 8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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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겨울방학이 끝나고 2학년이 되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후배가 생긴다며 배시시 웃는 모습이 예뻤다. 그나저나 사실 확인은 따로 해야지. 어린이집 다닐 때도, 유치원 다닐 때도 (후배)동생은 있었잖아. "그때는 나도 아기였잖아." 아! 자격? 나이만 처먹었다고 선배 행세하는 아빠보다 낫더라. 그나저나 내일부터 9살이구나.
아깝냐고?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잖아. 며칠 전 와인을 꺼냈을 때 엄마가 잔을 내밀어서 살짝 당황했다. "맛 괜찮아?" "아니야, 맛 없어." 좌우로 고개를 젓는 동작이 지나치게 컸니? 그렇다고 엄마가 한 번 더 물어볼 줄은 몰랐다. "진짜 별로야?" "맛 없다니까." 처음보다 더 커진 동작이 상당히 어색했나 보더라. 네 분석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아빠, 엄마에게 주는 게 아까워?"
선물 빨간 외투와 분홍 외투가 검정 체육복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어두운색 외투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면서? 엄마가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부탁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더구나. 아빠라도 그렇게 권했을 거야. "산타 할아버지께는 다른 선물을 얘기할 게 있어. 그냥 엄마가 사." 너, 산타를 믿기는 하니?
평가 예년보다 훨씬 줄었지만 올해도 많이 울었잖아. 산타할아버지께서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 테고. 많이 울었지만 착한 일도 많이 했을 테니 산타를 설득할 만한 착한 일을 얘기해보라고 했다. 갑자기 심각해지는 네 표정이 조금 웃겼어. 한참 말이 없기에 또 우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단다. "할머니 말 잘 들었고, 엄마 요리할 때 조금 도와준 적도 있어. 빨래도 함께 널었고, 방 청소도 했어. 그리고, 그리고…" 그래, 그 정도면 됐다. 메리 크리스마스~
예절 엄마는 네가 느닷없이 전화로 "어머니~"라고 하자 어쩐지 불안했다네. 끊기 직전에 "할머니께 전해드릴 말씀 없으세요?"라고 했다는 말을 듣자 아빠까지 어쩐지 불안하더라.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어서 말이다. 그날 저녁 이래 저래 상황을 확인했다. 그냥 학교에서 배운 높임말 연습 한 번 했더구나. 바르게 자라는 너를 속물(?)로 대하며 꿍꿍이를 계산했던 엄마도 아빠도 미안하다.
롱부츠 며칠 전 산 분홍색 롱부츠가 마음에 드는가 보더구나. 입을 때마다 끼이고 불편하다며 짜증내던 레깅스나 스타킹도 군말 없이 입고 말이다. 부츠 신기 편하고 잘 어울린다면야 불편 따위야 뭐. "아빠, 선생님한테 부츠 샀어요 하니까 선생님이 참 이쁘네 하셨어."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니 딸이기 전에 여자더라.
덜렁이 그러니까 아빠는 50리터 쓰레기 봉투와 종이 쓰레기 두 상자, 재활용 쓰레기를 담은 봉투 하나를 한꺼번에 들었잖아. 지갑과 휴대전화, 담배와 라이터는 주머니에 챙겼단다. 그 많은 쓰레기를 지정된 장소에 모두 처리하고 나서야 자동차 키를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지.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 이 복잡한 상황을 너는 한마디로 정리하더구나. "아빠, 덜렁이!"
내 얘기 정기적으로 짝이 바뀌면서 자리를 헷갈렸다면서. 한 친구가 자리를 잘 모른다고 얄밉게 얘기해서 짝이 바뀐지 얼마 안 돼서 착각했다고 말한 것은 참 잘했단다. 그런데 대충 넘어가면 될 일에 그 친구가 자기는 자리를 다 외운다며 또 얄밉게 얘기했다고? 허나 그 상황에서 네 답은 너무 적확했단다. "나는 네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얘기를 하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