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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4년 8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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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 뭐든 곧잘해서 칭찬듣는 네가 산수는 좀 안 된다 싶으니 스트레스를 받았나 보구나. 산수 문제 풀지 않으면 안 되냐고 물었지. 까짓 거 안 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 엄마가 앉아 있어서 말이야. "예지가 자동차를 만들어. 차 몸통도 이쁘게 만들고, 유리도 잘 달았어. 핸들도 튼튼하고 색깔도 이쁘게 칠했네. 그런데 바퀴를 똥그랗게 만드는 게 그렇게 힘든 거야. 바퀴는 그냥 만들지 말까?" "그러면 차가 안 가잖어." "산수도 바퀴 같은 거야. 만들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만들지 않으면 예지가 잘하는 다른 것도 아깝게 만드는 그런 거. 이해 돼?" 용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제를 풀겠다고 하더구나. 설득력이 쩔었지?
포인트 느닷없이 엄마에게 던진 질문에 당황했다. "검은 무슨 색인지 알어?" 사실 '검'인지 '곰'인지 '껌'인지 헷갈렸다. 엄마는 다행히 '검(劍)'이라고 들었는지 오답일 게 너무 뻔한 정직한 답 '은색'을 말했다. 당연히 틀렸고. 하지만, 네 답도 이해하기 어렵더구나. "주황색!" "왜?" (팔을 칼처럼 휘두르며)"쥬앙, 쥬앙! 쥬앙, 쥬앙!" 예전에 그런 개그를 즐기는 삼촌들 아빠 회사에 많다고 했잖아. 회사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그 개그 진짜 재밌구나.
노래방 네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가족끼리 노래방을 갔다. 새로운 것을 늘 경계하는 너답게 마이크를 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첫 노래를 부르더구나. 16점이었나? 움찔하는 네 모습을 보고 살짝 후회했다. 괜히 어린 마음에 상처를 준 게 아닌가 싶었지. 아빠와 엄마가 한 곡씩 부르는 것을 본 너는 일단 질러 줘야 점수가 나온다는 것을 금세 알아채더구나. 다음 노래부터 목소리를 확 키우더라. 각종 동요 메들리로 90점대를 기록하기 시작한 너는 '아기공룡 둘리'였나? 기어이 100점을 찍었다. 그제서야 마이크를 홀가분하게 놓고 엄마와 아빠 노래를 평가했지. 아빠가 93점을 받자 "그 정도면 잘했어"라고 말하는 네 표정에서 진심을 느끼지는 않았다만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나는? 날마다 튼실해지는 너와 달리 외할머니는 좋다고 달려드는 손녀를 잘못 껴안기만 해도 몸에 멍이 앉는다더라. 어쩔 수 없이 너에게 이런 식으로 달려들면 할머니가 이제 못 산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네. "그러면 나는? 나는 누가 돌봐?" 이게 네 반응이었다면서. 그래, 나부터 살고 보는 거지. 배려나 양보, 예절 따위는 천천히 배우거라.
썬팅 네가 차 뒷자리에서 '유레카'를 외치듯 왜 썬팅을 썬팅이라고 하는지 알겠다고 했잫아.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썬이 태양이잖아. 햇빛을 팅 튕겨내니까 썬팅이지." 사실 아빠 회사에 그런 개그가 아주 전문인 선배도 있고, 못지않게 즐기는 후배도 있거든. 아빠 취향은 아니다. 그런데, 네가 하니 느낌이 완전 다른 게 제법 재밌구나.
코스프레2 엄마가 새벽 출장을 가는 바람에 아빠가 학교에 데려다 줬잖아. 차에서 내린 네가 갑자가 포옥 안기더라. "아빠 사랑해, 잘 다녀와." 부비부비에 꼬옥 껴안고 뽀뽀. 그리고 손을 높이 들어서 흔들며 인사까지 한 번 더! 가슴이 벌렁거릴 만큼 좋았다만 수위가 조금 높아 수상했다. 너는 이별 퍼포먼스를 마치고 주변에 지나가는 아이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더구나. 다정한 아빠와 딸 코스프레 한 번 해보고 싶었니?
찌찌뽕 SBS 을 보던 네가 갑자기 "와~ 대박"이라며 감탄했다. 그 정도로는 아쉬웠는지 "와~ 초대박"이라며 한 번 더 강조했지. 갑자기 그 이상은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하더구나. "초대박보다 더 대박은 뭐라고 해?" 아빠와 너는 눈을 마주치자 마자 '초초초초초~ 대박'을 합창했지. 동시에 '찌찌뽕'을 외쳤고. 그래, 잘 가르쳤구나 싶어서 뿌듯했다.
모녀관계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트집 잡고, 투정부리고, 짜증 내고, 개겼다면서? 마지못해 엄마가 한마디 했다더구나. 그러자 너는 울먹거리며 짜내듯이 한마디 했다고. "그렇다고 모녀관계가 나빠진 건 아니지?" 그 심각한 상황에서 엄마는 웃겨서 뒤로 넘어갈 뻔했다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