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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4년 8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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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깔 느닷없이 엄마에게 물었잖아. 엄마 자신하고 나하고 아빠 중에 누가 제있 좋으냐고. 엄마가 바로 답하지 못하더구나. '자기애'와 '모성애', '부부애'까지 걸린 문제잖아. 그래서 아빠가 나섰다. "누구나 자신이 가장 좋아야 해. 자기를 좋아해야 뭘 하면 행복한지 알 수 있거든." 너는 그렇다면 두 번째는 누구냐고 묻더구나. 아빠도 되물었지. 엄마, 아빠 중에 누가 두 번째인지. 모르겠다는 게 네 답이었다. "엄마는 확실하게 예지가 2등, 아빠가 3등이고 아빠는 엄마가 2등, 예지가 3등." "나는 엄마가 2등, 아빠가 3등." 은근히 성깔 있더구나.
추리력 추리력이었나? 어쨌든 네가 그런 쪽으로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엄마가 걱정이 좀 됐나 보다. 나름대로 네 추리력을 끌어내 보겠다고 무슨 상황을 막 설명하더니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묻더구나. 어찌나 교묘하던지 아빠가 답할 뻔 했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던 너는 그냥 되묻더구나. 멋진 반격이었다. 엄마도 교육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을 테야.
3대 네 할머니는 드라마 앞에서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으면서 리모콘을 살짝 빼면 보고 있다며 버럭했단다. 네 엄마는 드라마를 안 보는 것 같아서 채널을 바꾸려고 리모콘을 잡으면 뭐냐면서 눈을 부릅뜨고. 아빠가 채널을 돌렸던 이유는 네가 TV를 보지 않고 구석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너는 보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울먹이더라. 3대에 걸쳐서 이게 뭐냐!
선택 '착한 예지'와 '예쁜 예지' 중에 뭐가 좋으냐고 물었다. 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둘 다"라고 답하더구나. 당연하고 둘 중에 뭐가 조금이라도 더 좋으냐고 한 번 더 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예쁜 예지'를 선택하더라. 너도 아이이기 전에 여자구나.
이혼? 네가 느닷없이 엄마·아빠가 이혼하면 누구를 따라가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적잖게 당황했다. "아빠를 따라오면 좋겠지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게 훨씬 많기 때문에 엄마를 따라가는 게 좋겠다." 너는 아직 결정하지 못 했으니 이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더구나. 참고 견디며 늘 행복을 탐구해야 할 이유가 생겼단다.
사회성 네가 아침부터 엄마에게 문제를 냈잖아. 엄마와 아빠 중에 누구를 좋아하는지 아느냐고. 엄마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자기를 지목하더구나. 네가 사회성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거지. '둘 다'라는 답을 듣고 참 꼬셨다.
성장2 엄마에게 떨어지면 뿌앙 터지던 껌딱지 아기가,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울먹이던 얼라가 이제는 엄마·아빠가 외출하자고 부르는데 본다고 머뭇거리더라. 또 그렇게 훌쩍 자라나 보구나.
교가 네가 읊는 교가 가사가 사뭇 비장하더라. '의에 죽고 참에 사는'이라니. 비장하기는커녕 비겁한 아빠는 그저 네가 '때 되면 죽고 재밌게 사는' 그런 아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