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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6년 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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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마주앉은 너에게 갑자기 이런 미션을 줬잖아. "예지, 아빠가 말하는 단어랑 반대되는 단어 말해 봐.""응.""yes.""no.""stop.""go.""good-bye.""hello. 그런데, 아빠 왜?" 그리고 아빠가 들려 준 노래가 'Hello, Goodbye'. 우리가 나눈 대화로 만든 노래야. 눈을 반짝거리며 신기한 듯 미소짓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비틀즈 이 아저씨들 대단하지 않니?
칭찬 무거운 수레를 들고 계단 가운데서 끙끙거리는 할아버지를 봤잖아. 아빠가 가뿐하게 해결했지. 히어로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걸으면서 아빠 팔짱을 살며시 끼던 너는 조금 전 감동을 전하더구나. "아빠, 다른 사람을 도우니까 기분이 좋아.""응, 아빠도." 그런데, 그 정도로 뭔가 부족했니?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나즈막하게 얘기했지. "아빠, 저널리스트 같어." 그 말을 생각해낸다고 뜸을 들였구나. 그나저나 예전에 엄마가 자기 말을 자꾸 왜곡한다고 아빠에게 '기레기'라고 했던 거 알지 모르겠다. 무슨 뜻이냐고? 몰라도 된다.
자존심 손가락 사이 (주부)습진이 생긴 아빠에게 엄마는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라 했잖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분홍색 고무장갑은 무슨!" 그냥 맨손으로 했단다. 싸나이 아니겠니! "아빠, 그런데 고무장갑이랑 자존심이 무슨 상관이야?" 날카로움 인정! 그러니까 아빠 말에서 유머 포인트는 어차피 설거지를 할 거면서 고무장갑을 핑계로 남자 자존심 운운하는 데 있단다. 아직은 좀 어려울 것이다.
성전환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설거지 얘기를 하다 보니 엄마 속 남성성과 아빠 속 여성성까지 얘기하게 됐네. 그나저나 성전환에 대한 네 생각이 갑자기 궁금했다. "물론, 자기 그대로 모습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 자기 모습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이 정도 답도 충분한데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너무 궁금했거든. "남자가 여자, 여자가 남자로 바뀌면 친구들이 놀리지 않을까?""그런 걸로 놀리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잘 못할 거 같아." 아!
주문 저녁 메뉴를 물었잖아. 엄마가 끓여놓은 국도 있고 카레도 있고. 반응이 시원찮아서 피자나 치킨 같은 거 먹고 싶느냐고 물었더니 잠시 망설이던 네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오늘 학원 마치고 나오는데 1층에서 치킨 냄새가 좋았어." 솔직히 아빠는 이 같은 여성 동지들 표현 방식이 너무 어렵고 힘들단다. 어쨌든 설득력은 쩔었다. 주문 직전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외치는 타이밍도 괜찮았고.
게임 라는 스마트폰 게임을 하더구나. 예부터 아빠 주변 아빠들은 게임과 전쟁에서 처참하게 당한 사연을 종종 하소연했다. "예지, 마인크래프트가 예지 베스트 게임 중에 몇 등이야?""마크? 4등?" 1~3등이 더 있어 당황했다. 게임이 궁금해서 설명을 부탁한 것은 아니었단다. 어쨌든 30분 동안 신나게 게임을 설명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와! 진짜 재밌겠네. 마크가 4등 할 만하네. 아빠도 해보고 싶다. 다음에 또 설명해 줘. 그리고 오늘은 좀 쉬고.""네!" 스마트폰을 놓으니 숙제 생각이 났나 보구나. 어쨌든 이게 아빠 방식이란다. 언제까지 통할지는 모르겠다만.
코디 너 아기 때부터 몸에 열이 많았잖아. 웬만한 추위는 그냥 무시하고, 밤에 자다가 이불 걷어차기 일쑤고. 집에서도 걸핏하면 갑갑하다며 옷을 벗고 다녔잖아. 차에 히터 틀면 창문 열기 바쁘고. 얼마 전 엄마가 사 준 러시아에서도 버틸 것 같은 외투는 진짜 마음에 드나 보다. 추우면 당연히 입고 가고, 덜 추우면 앞에 지퍼 열고 입으면 된다고 하고, 더우면 벗고 있으면 된다면서 입고 나가고. "예지야, 오늘은 포근한데. 그 외투 입으면 진짜 더울 텐데.""엄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 추울 수도 있잖아." 진짜 마음에 드나 보다.
사고와 장난 달마다 한 번씩 자리를 바꾼다며? 주변에 앉은 사내들이 예사롭지 않은가 보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걱정하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얘는 장난을 많이 치고, 쟤는 말이 너무 많고, 얘도 장난을 많이 치고, 얘는 사고를 많이 치고." 힘든 나날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장난치는 것과 사고치는 것은 뭐가 다른 지 궁금했다. 그것을 왜 모르느냐는 표정으로 답하길래 움찔했단다.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데 선생님한테 혼나면 사고, 혼나지 않으면 장난이야." 아주 깔끔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