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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6년 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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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수학 문제를 풀던 네가 갑자기 눈물을 뚝 떨어뜨리더구나.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공부도 기분이 좋을 때나 쬐끔 하는 거지 뭐. "아빠, 그게 아니라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돼서 속상해." 엄마 닮아서 욕심이 많구나. "예지, 괜찮아. 모르는 문제를 만나는 게 공부고 그걸 다시 알아가는 게 공부야. 생각해 봐. 계속 아는 것만 나오면 이상하지 않냐? 앞으로 계속 1 더하기 1만 나오면 예지야 틀리지 않고 신나게 잘 하겠지. 그렇게 잘 하고 싶은 것은 아니잖아." 마치 3개월 전부터 질문을 예상하고 원고를 준비해 외운 듯 막힘 없는 아빠 말에 어느새 눈물이 그쳤더라. 뭔가 알아들었을 때 반짝이는 그 얼굴이 보여 마음이 놓였다. "나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것 같어." 그래, 믿는다. 그나..
연휴 "아빠, 연휴가 끝나서 너무 섭섭해. 학교 갈 생각하니 에휴.""예지, 아마도 예지가 학교 다니지 않고, 엄마와 아빠가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면 연휴가 얼마나 좋은지 잘 모를 거야.""그렇기는 하지. 하기야 놀면 연휴가 무슨 소용 있겠어." 금방 이해하니 참 좋았단다. 하지만, 아가. 아빠도 말뿐이지 속으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뽀통령께서도 말씀하셨잖아. 노는 게 제일 좋다고.
쏘쿨 친구들과 놀다보니 엄마가 네게 얼마나 잔소리를 하지 않는지 슬슬 감이 오나 보더구나. 엄마 장점이고 아빠 영향력이라고 잘 차린 밥상에 국자 하나 올려 보마. "엄마, 엄마는 왜 내가 숙제 같은 거 안 할 때 뭐라 안 해?""네 숙제잖아. 엄마가 물어봤는데 안 하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책임은 예지가 져야 하는 것이고.""엄마, 난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 엄마가 잔소리를 할 때가 있잖아. 이를테면 쩝쩝거리면서 먹을 때? "예지, 지금도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왜?""별 것도 아닌 걸로 잔소리하잖아.""할말은 해야지." 뜻밖에도 쿨하더구나.
예외 하늘이(고양이)가 자는 모습을 보며 아주 흐뭇해 하더구나. 귀엽다를 연발하는 네 모습이 오히려 귀여웠다. "세상에 저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야." 이럴 때 괜히 비틀고 싶은 게 아빠 심보란다. '단 한 명도 없다'는 오만한 명제에 제동을 걸고 싶기도 했고. 아빠 하는 일이 좀 그래. "안 귀여워! 하나도 안 귀엽다고!""하나 있고." 재빠른 오류 수정이 멋졌다. 침착한 대응에 놀랐단다. 갑자기 말문이 막히더구나. 남들이 그렇게 경고하던 시간이 엄습했음을 실감했다.
끝말잇기 아빠가 술김에 영어로 끝말잇기를 하자고 했잖아. 사실 금방 끝날 줄 알았거든. 아빠 영어 실력은 정말 천박하단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래가더구나. 서로 발음이 낯선 것은 분명했어. 난 네 굴리는 발음이 도통 뭔지 모르겠고, 너는 또박또박(?)한 아빠 발음을 알아듣지 못하더라. 그래도 마지막 스펠링만 알면 끝말이야 이어지는 것이니 뭐. 아빠가 쉽게 무너지지 않았지? 일단 휴전(?)하기로 했잖아.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아빠 저력은 '주입식 교육'이란다.
가창력4 어린이 합창단(?)이 부른 을 듣고 있더구나. 아빠도 참 좋아하는 노래다. 나즈막히 흥얼거리며 따라부르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아빠, 나도 노래 잘 부르고 싶어.""왜? 노래 잘 부르는 게 잘 안 돼?""응, 다른 거는 괜찮은데 음정을 맞춘다거나 음이 높게 올라가면 부르기 어려워." 그 정도면 거의 다 안 되는 거 아니냐?
보글보글 컴퓨터와 40인치 TV를 연결해 너와 '보글보글' 2인용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더구나. 이런 게 '과학기술의 진보'가 아니라면 뭐가 과학이고 문명인가 싶단다. 헤벌레 하는 네 표정에서 이 게임이 고전이며 명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엄마는 왜 가만 있는 딸에게 느닷없이 오락 따위를 가르치느냐고 발끈하더구나. 그런데 아가, 아무리 네 엄마가 우리집 끝판왕이지만 말은 바로해야겠다. 이 오락은 예전에 네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미 전수한 바 있다. 새삼 느닷없이 가르친 게 아니지. 게다가 이 게임은 과거 아빠 연애 시절 네 엄마에게 전수한 것이기도 하다. 그때 둘이서 노트북 앞에 앉아 끊임없이 연결해 마지막 100번째 라운드를 클리어 해내며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확인했지. 여러 정황으로 미뤄 ..
고슴도치 우리 가족이 5㎏이 넘는 하늘이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려면 안고 갈 사람이 엄마뿐이더구나. 너는 힘이 딸리고 아빠는 알레르기가 있잖아. 길에서 유모차에 탄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하늘이를 보고 혀짧은 소리로 "호랑이"라고 하는 거 들었냐? 엄마는 그것도 자식(?) 칭찬인가 싶어 헤벌레 하더구나. "고양이보고 호랑이라니까 좋나?""흐흐, 좋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너를 보는 엄마 표정은 늘 그랬단다. 헤벌레, 헤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