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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6년 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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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 며칠 전 아빠가 휴대전화 담는 가방에 넣고 급할 때 쓰라고 만 원 줬잖아. 아빠는 쪼잔하게 뭐 하면 용돈 주고 그런 거 없는 거 알지? 사랑에는 조건이 없거든. "예지, 만 원 다 썼어? 용돈 필요하지 않아?""어, 조금 남았어." 씻으러 들어가는 아빠를 굳이 다시 부르더구나. 대화에서 뭔가 부족했다는 느낌은 받았단다. "아빠, 2000원치 빵 사서 할머니 드렸어.""아이고, 할머니가 좋아했겠네. 참 잘했구나.""할머니가 맛있다고 하셨어." 배시시 웃는 모습이 예뻤지만, 나머지 8000원은 어디에 썼는지도 궁금했단다.
수면 침대에서 엄마와 나란히 자는 모습이 보기 좋더구나. 한쪽 다리를 접고 자는 모습이나, 피곤하면 입을 반쯤 벌리고 자는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침대를 반으로 접어서 찍으면 딱 겹치겠다 싶더라. 그나저나 아빠 자리에서 언제 비킬 거냐? 멀쩡한 침대와 아내를 두고 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는 게 무더위 때문이라면, 아빠는 여름을 이해할 수 없단다.
영화 영화 을 보고 한없이 펑펑 울더구나. 네 감수성 그런 거는 잘 모르겠고, 역시 아빠와 딸 스토리가 짱이라고 생각했단다. 예전에 엄마가 영화를 보고 펑펑 우는 너를 달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좀 알겠더라.
역전 "예지, 아빠가 예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얼마나?""요~ 만큼." 엄지로 새끼손가락 끝을 지그시 누르면서 너에게 내밀었잖아. 진짜 쬐끔, 진짜 쬐끔 이런 표정으로. 아빠 손끝을 심드렁하게 보던 너는 미동도 없이 단호하게 처리하더구나. "빼고 다!" 그게 뭐 좀 아쉽고 안타까워 해야 재미 있는 것인데 말이다.
표정 엄마가 네 표정을 담은 사진으로 '이모티콘을 만들었다'며 보여줫어. 엄마 스마트폰 속 너는 졸지에 웃고 찡그리고 울고 성내는 이모티콘이 돼 있더구나. 네 자라는 모습을 보며 표정이 참 다양한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것 같아서 뿌듯했다.
본능 학원 가기 직전 빵집 앞에서 샌드위치와 팥빙수를 먹으니 어땠니? 아빠는 유러피언이 이런 건가 싶더라. 길만 건너면 되는 학원에 갈 시간이 다 됐다면서 자꾸 시간을 묻길래 다음 다음 신호에 건너면 되겠다고 했지. 팥빙수는 절반 정도 남았고. "아빠, 있잖아. 나 사실 학원 조금 늦어도 돼." 네 번째 신호가 바뀔 때 마지막 얼음덩어리를 원샷한 네 표정이 좀 안타까웠다. 좋은데 입 얼얼하고 머리 깨지는 표정 말이다. 맛있었니?
선빵 "아빠, 미안해요." 전화기 너머 울먹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구나. 그래, 휴대전화 액정이 또 깨졌다고. 네 번째인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미안할 게 아니다. 폰은 고치면 되지. 그동안 마인크래프트 못해서 섭섭하겠네.""아니에요. 헤에~." 전화를 끊고 나니 알겠더라. '미안' 따위는 '선빵'이었다는 것을. 그 수법이 어쩐지 익숙하여 차마 뭐라할 수 없었다.
여유 "난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아빠는?""두 번째.""외할머니는?""외할머니는 순위에 없어. 우리 가족만 순위 매기는데.""그러면 아빠가 꼴찌인가?""응." 옆에서 얘기를 듣던 엄마가 식구 3명에 무슨 순위냐며 비웃더구나. '1등의 여유'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