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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6년 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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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아빠~." 수화기 너머로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간드러지고 행복에 겨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너는 부탁할 때도 그런 목소리를 내지 않잖아. 게다가 아빠는 토론회 취재 중이었거든. 바로 옆에 앉은 한 아주머니가 휴대전화 밖으로 삐져나온 네 목소리를 듣더니 배시시 웃더구나. "붕대 풀었어요.""그래? 좋겠네.""으흥흥흥흥…" 손가락을 접질러 3주 남짓 깁스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드디어 붕대 해제(?)를 선언했구나. 그런 목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구속은 그렇게 괴롭고 자유는 그만큼 달콤하단다. 그나저나 손에서 발냄새(?)가 나기 시작했는데 이제 씻을 수 있어서 또 다행이다. 앞으로 조심하자꾸나.
롤러코스터 너를 옆에 태우고 가다 보니 지하차도가 보이더구나. 차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영화의 도시' 부산에 사는 아빠답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너도 지지 않고 '영화의 도시'에 사는 딸답게 내리막길이 끝날 때까지 비명을 지르더구나. 지문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두팔까지 높이 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우리 평범한 소형차는 3초 정도 롤러코스터가 됐지. "예지, 롤러코스터 타 봤어?""아니, 키가 안 돼서 아직. 다음에 가면 타려고." 좋다, 한 번 타러 가자!
날개 "아빠, 저도 친구들처럼 인터넷에 동영상 올리고 싶어요." 벌써 그럴 때가 됐구나. 낯가림 심하고 엄마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던 껌딱지가 이제 스스로 드러내고 싶은 욕구를 말하는구나. 아가, 하지만 말이다 동영상을 올리면 친구는 물론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이든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야 해. 너를 좋다는 사람도 많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웃고 욕하고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걸 견뎌야 하는데, 아빠는 네가 동영상 올리고 사람들 얘기에 기분 좋다가 울적하다가 그러느니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훨씬 재밌는 것을 찾았으면 좋겠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재밌는 게 너무나 많을 때잖아. 안 그런가? 사실 이런 아빠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좁디 좁은 생각으로 그저 네 날개를 붙드는 게 아닌..
인과 휴대폰 화면 보호판이 또 깨졌더구나. 그래, 또! 이번에는 진짜 화면 차례인데, 아빠가 기억하는 것만도 보호판-액정-보호판-액정-보호판… 5번이구나. 그 사이 수리는 두 번 했잖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때는 이유를 알아야 하지 않겠니? "예지, 또 깨졌네. 이렇게 자꾸 깨지는 이유가 뭘까?""응, 그냥 떨어트렸을 때는 괜찮은데 내가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다가 친구와 부딪히거나 놀다가 넘어지면서 휴대폰을 든 손으로 땅을 짚을 때 깨져. 그래서 휴대폰을 안 쓸 때는 가방에 넣어두려고." 원인과 결과까지 관계가 아주 뚜렷하고 문제 인식은 물론 해결책까지 명확하게 제시하는 게 참 기특해야 마땅할 텐데 말이다. 그게 참 얄미울 때도 있더라.
추적 아침에 휴대폰을 한참 찾더구나. 전화를 걸었는데 벨소리도 들리지 않고, 너는 좀처럼 어디에 뒀는지 기억을 못하네. 분명히 학원에서 집에 올 때도 갖고 있었다면서 생각은 안 난다니. "폰 집에 들고 온 것은 어떻게 기억이 나?""분명히 들고 왔어." 얼굴에서 진심이 엿보였어. 아빠가 또 능력을 발휘해야지 어쩌겠니. "예지, 잘 생각해 봐. 너는 분명히 가방을 메고 있었을 거야. 왼손은 손가락을 다쳐 깁스를 했으니 휴대폰은 분명히 오른손에 들었을 거야. 그러면 집에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왔어? 비밀번호 누를 손이 없는데?" 잠시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현관 쪽으로 뛰더구나. 현관 문을 열자 창틀에는 무심한 주인 덕에 외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휴대폰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지. 휴대폰을 집어들며 아빠를 향해 보내는 ..
부상 놀다가 새끼손가락을 접질렀더구나. 그 소식을 전한 엄마는 목소리부터 아팠단다. 붕대로 감은 손가락이 참 짠했다. 머리보다 허리보다 팔보다 다리보다 무릎보다 가슴보다 엄지보다 검지보다 중지보다 약지보다 무엇보다 그나마 새끼손가락이라서 그나마 그나마 다행, 다행이다만…. 안 다치고 클 수는 없다는 거 잘 안다만…. 그래도 다치지 않았으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지, 손꾸락 많이 아팠겠다.""응.""엄마, 아빠 마음은 더 아픈 거 알지?""헤~"
삼지창 친구 중에 지우, 지후와 유난히 친하다면서? 셋 모두 이름에 '지'가 들어가더구나. 그래서 고민 끝에 너희 셋을 묶어서 부를 수 있는 별명을 생각해냈단다. '삼지창'. 이 쌈박한 작명을 너에게 문자로 보냈지. 너는 '아빠, 우리 셋을 묶어서 그렇게 재밌고 기발한 별명을 지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삼지창 이미지가 우리가 쓰기에는 좀 공격적이고 불편하네요. 그래도 재밌어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이렇게 짧게 답장을 보냈더구나. '우쒸! ㅋㅋ' 너무 짧아서 아쉬웠지만, 네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단다.
엄살 폭 안기면서 머리로 아빠 배를 콩콩 박았잖아.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아이구 배야" 하며 뒹구는 아빠 연기 봤지? 영화의 도시 부산에 사는 아빠답지 않던? 그나저나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더니 야무진 목소리로 말하더구나. "일어~섯!" 우리가 너를 그렇게 키웠나? 순간 얼라처럼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