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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6년 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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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회 소체육회를 한다며(무슨 운동회 같은 거냐?). 전에 소풍 갈 때도 물었지만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이예지, 1번!""1번? 아! 안전!""2번!""2번도 안전! 흐흐.""3번!""재미! 흐흐흐흐." 그래, 아빠는 말이다 주입식 교육이 마냥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아.
편지 어버이날을 맞아 엄마·아빠에게 보낸 편지에 항상 도와줘서 고맙다는 대목이 와닿았단다. 하지만 '그만큼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은 목에 걸린 가시 같더구나. "여행 가면 짐도 들고, 엄마·아빠 도와주기도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고, 이제 예지는 짐이 아니라 우리집에서 중요한 전력이야." 배시시 웃는 얼굴에서 아빠 대응이 얼마나 적확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 "예지, 너는 존재 자체가 행복이고 큰 도움이야. 예지가 없었다면 엄마와 아빠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그만한 도움이 어딨어?" 활짝 웃는 얼굴에서 엄마가 이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단다.
금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보던 너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외쳤지. "가위~ 바위~ 보!" 아빠는 묵을 냈는데 너는 빠를 내더군. "예지, 저거 안 보여?" 아빠가 엘리베이터 문에 붙어 있는 '빠 금지' 스티커를 가리켰잖아. 피식 웃던 너는 이렇게 말하더구나. "아빠는 그러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왜 쓸데없이 가위바위보야?" 조금 부끄러웠단다.
유통기한 냉장고에 있는 플라스틱 우유병을 보니 희미한 글씨가 적혀 있더구나. 볼펜으로 꾹 눌러썼네. 쉽지 않았을 텐데. '유통기한이 지났습니다. 이예지'. 3일 지났구나. 엄마·아빠가 모르고 마실까봐 불안했니?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아빠는 남은 우유를 마저 마셨어. 3일 지났으니 마신 게 아니라 분리배출인가? 네가 좋아하는 떠먹는 요구르트도 아빠는 날짜 지난 것만 먹거든. "아빠, 날짜 지난 거 왜 먹어?""지구를 위해서." 지구를 위한 게 또 너를 위한 거지 뭐.
인사 "아빠, 어떤 친구들은 선생님이 지나가는데 뒤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가는데, 나는 '선생님' 부르고 선생님이 나를 보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 해." 참 잘하는구나. 아빠 회사에서는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사를 했다는 후배와 인사를 받지 않았다는 선배들이 티격태격(?)하거든. 신기하지? 그런데 어른들은 그걸 또 팍팍한 일상에서 작은 재미라고 생각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게 좀 복잡하단다.
1승 잠탱이 엄마는 네 먹일 김밥 싸느라 새벽 5시에 일어나더구나. 평소 그 시간에 아빠가 수면을 조금이라도 방해했다면… 됐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너는 엄마에게 배시시 웃으며 설레인다고 했다면서. 엄마는 자기는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해도 그렇게 표현하지 못했다며 너무 예뻤다네. 고슴도치! 그나저나 엄마 말이 맞다면 네 감수성과 표현력은 아빠 덕이잖아.
거짓말 친구 아빠가 라디오에서 아빠 목소리를 들었다고? 친구에게 그 얘기를 듣고 기분이 좋았다며. 네가 좋다니 나도 좋다만 정황상 거짓일 확률이 높아 보이더구나. 먼저 아빠가 하는 방송은 경남에서 나오거든. 부산 동쪽 끝에서 듣기는 아주 어려워서 말이다. 몇 가지 질문으로 참과 거짓을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만 그냥 말았단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니. 네가 벌써 아빠에게 바람 넣을 줄 안다는 게 뿌듯했다. 그리고 아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거짓말은 아주 좋아하거든. 특히 내용이 기발하다면 더욱 더!
훈련 네가 없었다면 말도 되지 않는 억지 투성 얘기를 끝까지 들어야 할 인내도 필요 없었다. 아빠 얘기를 여린 네가 잘못 받아들이지나 않을까 두 번, 세 번 조심할 이유도 없고. 늘 공감이 부족한 지점이 없지 않나 반성할 일도 없었지. 엄마 말로는 아빠를, 한 사람을 10년 동안 이렇게 훈련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냐더라. 나이는 상관없고 애를 키워봐야 어른이라는 어르신들 말,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닌가 보다. 특히 말 한마디 하면서 다른 사람 배려하는 것만 놓고 보면 너보다 훨씬 못한 어른들을 볼 때면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