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편지/2016년 10살

(90)
속셈 to 10살 이예지 양 "예지, 생일 축하해.""어? 아빠,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니까 말이다. 아빠가 무슨 딴살림을 차린 것도 아니고, 슬하에 자녀가 10명쯤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너밖에 없는데 기억 못할 이유가 없잖니. "저도 잘 몰랐는데."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보면서 아빠는 이미 알아챘단다. 잘 모르기는커녕 3월 중 너에게 의미 있는 날은 생일뿐이라는 거. 그래서 결코 축하 인사 따위로 만족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아빠, 난 생일이 학기 초라서 친구를 잘 초대하지 못했는데…" 그래, 아가. 이제 시작 아니겠니. 쿨럭!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딴말 to 10살 이예지 양 외숙모가 딸 대학 합격기를 한참 얘기하는 것을 듣던 네가 자그맣게 얘기했지. "아빠, 난 엄마와 아빠가 실망하지 않는 대학 갈 거에요." 실망이라. 네가 계단에서 굴러 입원했을 때 네 옆에서 수없이 다짐했던 게 있단다. 존재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며 살겠다고. "아빠는 예지가 아무 대학이나 가도 돼. 대학 못 가도 상관 없어. 실망 같은 거 안해.""진짜?""응.""나중에 딴말하기 없기." 앗! 아가, 처음 한 말은 진심이었니? 그리고 아빠는 몰라도 엄마는 만만찮을 것이야. 후훗.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직업 to 10살 이예지 양 "아빠, 친구들한테 우리 아빠 신문기자라고 말하니까요…" 아가, 잠깐! 순간 많은 생각이 스칠 수밖에 없었단다. 욕 많이 처먹는 일이거든. 게다가 아빠는 자질이 부족한 쪽이란다. "부럽대요." 음… 그래, 고맙네. 진짜로.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퀴즈 to 10살 이예지 양 선생님이 프린트해 준 문양에 색칠을 했다며 보여주는 알록달록한 그림이 참 예쁘고 신기했다. 슬쩍 그림을 보여주던 너는 다시 그림을 감추며 묻더구나. "아빠, 내가 무슨 색을 제일 적게 썼게?""글쎄.""보기 불러 줄게.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갈색, 하늘색, 검정색." "갈색?""아니, 많이 썼는데.""모르겠네.""하얀색. 문양을 색칠하면서 하얀색을 쓸 필요가 없었거든." 그렇구나. 그런데 아가, 하얀색은 왜 보기에서 뺐니?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상장 to 10살 이예지 양 한 학년을 마무리하며 받아오는 상장이 많더구나. 시험 점수도 아주 훌륭하고 말이다. 배시시 웃으면서 대단한 게 아닌 것처럼 말하는 네 모습이 예뻤단다. 혼을 담아 리액션을 펼치는 엄마와 달리 그냥 잘했다며 담담한 모습을 보인 아빠가 약간 섭섭했니? 사실 리액션 부문은 엄마보다 아빠가 몇십 배 낫단다. 엄마가 대종상 정도라면 아빠는 오스카 수준이지. 하지만, 너무 오버하면 네가 기대만큼 못했을 때 애써 담담하게 대처했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저렇게 기뻐 날뛰는 것을 보니 전에 괜찮다고 했던 것은 개뻥이었구나 생각하면 안 되잖아. 어쨌든 기쁜 마음은 이렇게라도 남겨두마. 욕봤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작명 to 10살 이예지 양 아빠 얼라 때 똥개 네 마리를 키우는 이웃이 있었어. 그런데 그 개 이름이 뭔지 아니? 글쎄 달타냥,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였다. 무려 30여 년 전이란다. 개 이름이라고 해봤자 쫑, 메리 기껏 신경 좀 쓰는 집에서는 '점프' 정도였단다. 그런데 주인공이라니. 별 거 아닌 똥개 네 마리가 함께 뛰면 이름 때문에 괜히 멋졌지. 지난해 정말 계획이라고는 전혀 없었다만 너 때문에 고양이를 들이게 되면서 작명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마침 그 고양이가 수컷 '러시안블루'라는 것을 알고 아빠가 처음 떠올린 이름은… 그래, '효도르'였어. 러시아 출신 이종격투기 선수. 60억분의 1 사나이! 완전 멋있지 않니? 물론 레닌, 트로이츠키, 차이코프스키, 짜르… 이런 이름에 미련이 없었..
재회 to 10살 이예지 양 사촌 언니들과 놀겠다며 외할머니집에서 하루 묵은 너를 보자마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단다. "예지, 아빠 안 보고 싶었어?""보고 싶었어.""그런데 왜 전화 안 했어.""배터리가 떨어져서. 아빠는?""어, 너 노는 거 방해할까봐." 슬쩍 웃는 표정에서 살짝 묘한 기운을 느끼기는 했어. "아빠.""응?""그럴 듯한데." 아가, 표 나더냐?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마음 to 10살 이예지 양 장난을 받아주지 않은 너에게 아빠가 밉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여자 마음을 몰라." 아빠는 여자 마음을 몰라. 아빠는 여자 마음을 몰라. 아빠는 여자 마음을 몰라. 아빠는 여자 마음을 몰라… 비수가 돼 꽃히더구나. 10년 동안 특훈(?)으로 겨우 엄마 마음을 알겠구나 싶었는데, 이제 네가 여자가 되었구나. 그래, 대한민국에서 10대 초띵이면 여론 주도층이지.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