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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6년 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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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역할 "예지가 요즘 자기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아." 엄마가 조용히 아빠를 부르더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를 하더구나. 무섭다니! 무섭다니! 물론 아빠는 너무 억울했지. 가끔 네 무리한 행동을 나무랐지만 충분히 네 감성 성장 수준을 고려해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생각했거든. 게다가 평소 네 기분 맞추는 거에 비하면 '새발의 피의 피피피' 아니겠냐는 거지. "뭐라하는 것은 내가 할 테니 자기는 될 수 있으면 좋게만 대해줬으면 좋겠어." 아가, 갑자기 짠한 생각이 들었단다. 사실 강철 심장, 무쇠 멘탈 네 엄마는 태어나기 전에 아빠가 돌아가셨거든. 그래, 네 외할아버지. 갑자기 엄마 얘기를 들으면서 너에게 좋은 아빠가 되는 것과 네 엄마가 그리는 좋은 아빠가 된다는 것을 함께 생각하게 됐단다. 어렵더구나.
이 소리는 오! 오! 오! 이 소리는 지난달에 쓰고 남은 '알'이 이번 달에 합산돼 더 여유 있게 휴대전화 데이터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문자로 확인한 네 입에서 나온 탄성이더구나. 몇달 전만 해도 알이 부족해 늘 허덕이더니. 무엇보다 동영상 감상을 줄이겠다던 약속을 '알'로 확인할 수 있어 흐뭇했단다. 혹시 알 떨어지면 얘기해라. 엄마에게 함께 사정하게.
금수저 아이폰5s 액정을 아작냈더구나. 놀다가 그랬다니 뭐라할 수도 없고. 폰 수리점에 가서 견적을 내니 10만 원이더라. "아빠, 100만 원 넘게 나오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호방한 계산이 엄마를 닮았구나. 그 기상만은 '금수저'다.
흔적 차 뒷좌석 시트 사이에 양말을 꽂아뒀더구나. 운전석 아래 굴러다니는 음료수 컵이 보이고. 조수석 뒤 주머니는 쓰고 버린 휴지로 불룩했지. 작은 차 뒷좌석이 좁다고 여기기 시작했는지 항상 옆에 태워야 했던 엄마를 조수석으로 방출(?)한 게 여섯 살 때였나? 뒷좌석에 벌러덩 누워 잠이 든 너를 보며 엄마는 또 괜히 뿌듯해 했단다. 어쨌든 치우는 것은 언제나 귀찮은 일이다만 등지고 있느라 볼 수 없던 네 흔적을 보는 재미는 쏠쏠하단다.
농담과 진담 밥을 먹는 너를 빤히 쳐다보는 이유가 궁금했니? "왜 자꾸 봐?""응? 너무 못나서.""풉, 아빠가 더 못났거든요." 잘 안다. 다만, 아빠는 농담을 하는데 너는 진담을 하더구나. 언제든 필요할 때면 진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복수 간만에 농담 배틀(?)을 벌이다가 말문이 막히니 아빠에게 한다는 소리가… "힝, 딸바보!""뭐! 딸바보라니! 그게 뭔데?""딸밖에 모르잖아!""아니거든! 아빠는 예지보다 엄마가 우선이거든!" 뭔가 큰 주도권을 빼앗긴 듯해서 발악했던 부분이 없잖아 있기는 했단다. 그런데 살짝 흘겨보던 너는… "칫, 부끄러워 하기는…" 아주 빅엿을 먹이더구나.
착취? 아빠가 만든 음식이 너무 맛있다며. 엄마 음식 솜씨는 최고이고. 외할머니가 모처럼 집에 와서 밥을 차려 주니 이렇게 말했다면서? "할머니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 입맛이 돌아요." 그러니까 말이다. 아빠는 네가 사람을 참 잘 부려먹는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쳤단다.
자전거 한동안 중심잡는 것조차 버거운 모습이 그저 안쓰러웠단다. 넘어지지 않고 출발은 된다 싶더니 곧 비틀거리면서도 꽤 먼 거리까지 페달을 밟더구나. "핸들을 틀면 비틀거려. 가고 싶은 쪽으로 몸을 조금만 기울이면 돼." 아파트 작은 광장을 몇 바퀴 도는 네 표정이 참 벅차 보였단다. 동그란 이마는 유난히 반짝였고, 뒤로 흩날리는 머리칼은 보는 것만으로 후련하더구나. 아빠 앞을 지나며 금세 작아지는 네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봤어. 너는 그렇게 자라며 멀어지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거야. 더 큰 세상으로 나가면서 멀어지고 또 자라겠지.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