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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6년 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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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치킨을 뜯던 네가 느닷없이 던진 명제가 흥미로웠다. "아빠, 드라마는 똑같은 거 같어.""뭐가?""경찰이 나와. 범죄가 있어. 그리고 연애해. 의사가 나와. 환자가 있어. 그리고 연애해. 부자가 나와. 사람을 만나. 그리고 연애해. 다 그래." 제대로 봤구나! 아빠는 그 똑같은 구조가 별로란다. 엄마는 경찰, 의사, 부자마다 다른 디테일에 흥미를 느낄 것이고. 드라마보다 이 좋다는 네 단호함이 꽤 맘에 든다.
충돌 학교에서 친구와 부딪혔다며? 이마에 희미한 자국이 있는 것으로 봐서 꽤 충격이 컸나 보더구나. 친구는 뒤통수를 움켜쥐며 뒹굴었다고. "아빠, 내 실수도 있지만 옆에서 다른 친구들이 나보고 잘못했다고 계속 얘기해서 더 속상했어." 일단 참치캔 두 개로 왜 추돌 사고 때는 100% 뒷차 책임인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다행히 잘 알아듣더구나. 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문제는 옆에서 계속 잘못했다고 얘기했던 친구들인데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늘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해. 누구나 인정하는 빼어난 재주가 있으면 괜찮은데 그런 재주라는 게 또 누구에게나 있지는 않거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게 훨씬 쉬운 방법이야. 그렇게 내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
속뜻 아빠가 엄마에게 "미운 엄마 안녕?"이라고 인사했잖아. 그게 영 마음에 걸렸나 보구나. "아빠, 엄마가 왜 미워?""예지, 아빠가 미운 예지 안녕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들어?"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네가 내놓은 답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단다. "아~ 귀엽다는 뜻이구나!"
양말 식탁 위에 네 양말이 굴러다니더구나. 식탁 위에 말이다. "예지, 이 양말 신은 거야, 안 신은 거야?""바닥 시꺼매? 안 시꺼매?" 멀찌감치서 집중해서 보던 너는 오히려 되묻더구나. 그러니까 아가, 아빠가 그거 보기 싫어서 너에게 묻잖아. 이 자식아!
경쟁 샌드위치가 두 조각 남았네. 모양과 내용물이 서로 다른 샌드위치더구나. 막바지에 정리해놓지 않으면 한 조각 남았을 때 곤란한 상황이 생긴단다. 그런 일 혹시 겪어보지 않았니? "예지, 둘 중에 하나 골라. 둘 다 먹을 수는 없어.""알아." 잠시 고민하던 너는 네모 샌드위치를 골라 집어들더구나. 입으로 넣으려는 순간 아빠가 제지하면서 말했다. "잠깐, 아빠도 그거." 입으로 향하던 손을 멈추며 움찔하는 네 표정이 웃겼단다. 당연하지. 이런 일은 처음 겪었을 테니. 하지만 너도 슬슬 이런 일을 겪을 나이가 됐다. 십대잖아. "가위바위보 해." 알지? 꼭 이런 상황에서는 아빠가 이긴다는 거. 세상 돌아가는 게 그렇더라고. 무슨 법칙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빠가 이겼으니까 이긴 사람 마음대로 할게. 예지가 네모..
생일 아빠 생일이라고 카드를 내밀 때 선물이 없다는 것 정도는 바로 깨달았다. 엄마 생일도 그렇게 넘겼는데 아빠 따위야. 하지만 내용은 정말 환상적이었어. 특히 삼행시에서 울컥했다. 이...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승... 승! 환! 우리 아빠시죠환... 환각인가?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내 아빠라니! 썩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네 엄마는 그런 아빠가 자기 남편이라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시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잘 자라는 네가 새삼 고맙다. 그래도 요즘은 영 편지를 쓰지 못했구나. 그래, 그런 시절이거든. 발가락을 다쳐 2주 전부터 깁스를 하고 있잖아. 편히 걸음을 옮길 수 없어 갑갑해하는 네가 안쓰럽다. 하지만, 네가 지금 사는 세상은 앞으로 깁스보다 훨씬 더 너를 구속하고 갑갑하게 할 게 분명하단다. 그런 세상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람들이 나서기로 했어. 11월 12일, 바로 오늘이다. 우리 멀리는 못 가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러 가자. 깁스한 발에는 두꺼운 엄마 양말을 신겨줄게. 시민이 주인이라는 나라에서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모든 사람과 서로 응원하자꾸나. 많이 부끄럽다만 4년 전 네게 했던 말을 한 번 더 할게. “넌 원칙과 상식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
부석사 어머니가 계시는 경기도 부천을 다녀왔다. 어머니를 먼저 뵙고 강원도 속초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려 했으나 일정을 그르쳤다. 우리 집 실세인 딸이 한 살 터울 사촌 언니와 놀다 발가락을 다쳐 깁스를 한 탓이다. 실세는 언니와 더 놀아서 좋다며 붕대 감은 발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 철딱서니를 보며 비선 실세인 아내와 웃고 또 웃었다. 경기도 부천에서 부산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경북 영주를 들렀다. 가까스로 가족이 맞춘 휴가를 공치는 게 아쉬웠다. 부천에서 부산까지 안 그래도 먼 길, 크게 에둘러가지 않는 곳을 고민하다 떠올린 곳인 부석사다. 목발을 짚고도 신난 딸을 업고 무량수전 앞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딸 몸이 더 크거나 내 몸이 더 버티지 못해 곧 없을 일이라 생각하니 버겁고 또 섭섭했다. 무량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