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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4년 8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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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출2 아빠가 가방을 메고 양손에 네 가방과 외할머니가 싸 준 반찬에 택배로 온 물건까지 들고가다 보니 손에 쥔 휴대전화가 빠지려고 하더구나. 다급한 마음에 너에게 (휴대전화를) 구해달라고 했지. 순간, 너는 멈칫하더니 씨익 웃으면서 손가락 아홉 개를 펴면서 '구(9)'를 외쳤잖아. 잊지 않았구나. 어쨌든 뿌듯했다.
스케일 생신을 앞둔 외할머니께 네가 무슨 선물을 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몸이 불편해도 너에게 헌신하는 외할머니잖아. 선물을 고민하면서 외할머니를 더 생각했으면 좋겠다 싶었어. "부엌?" 다행스럽게도(?) 외할머니 집 부엌은 얼마 전에 리모델링했다. 여튼, 엄마 닮아서 스케일이 크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렴. 좀 간단한 것으로.
경계 네가 느닷없이 얼굴에서 어디까지 볼이냐고 물었잖아. 평범한 아빠라면 당황했겠지. 준비된 아빠는 다르단다. "입에 바람을 넣었을 때 튀어나오는 데까지가 볼이야." 실제 입에 바람을 넣고 얼굴을 만지면서 볼을 확인하는 모습이 참 예뻤다.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으렴.
장점 "누구나 뭐든지 다 잘할 수는 없잖아?" 아빠는 무척 공감한다. 아빠만 해도 거짓말이나 나쁜 짓은 잘 못하겠더라고 그랬지. 그 말을 들은 너는 뒤로 넘어가면서 웃더구나. 왜? 한참 웃다가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네가 엄마에게 물었지. "엄마는 아빠와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잖아. 그런데 아빠가 잘하는 게 뭐야?" 이번에는 엄마가 뒤로 넘어가면서 웃더구나. 왜!
부당거래? 엄마가 나가면서 너에게는 숙제를, 아빠에게는 청소를 시켰다. 둘다 한참 개기는 중에 아빠가 너에게 제안했지. "아빠가 예지 숙제하고, 예지가 청소하면 안 될까?" "아니!"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있어도 왜 그렇게 단호한지는 모르겠더라. "내 숙제는 아빠한테 쉽지만, 아빠 청소는 나한테 힘들어." 일단 대구가 맞아떨어져서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고급 기술(?)을 동반하지 않은 수작은 통하지 않겠다 싶어 아쉬웠고.
보복 "나는 어떤 아이야?" "예쁘고 착한 아이지." 엄마 답은 충분히 예상했다. 오히려 이어진 질문이 조금 놀라웠지. "내 단점은 뭐야?" "예지가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어." 혹시 단점이 없다고 생각했니? 엄마 대답을 듣자 궁시렁거렸더구나. 스스로 적극적이라며 말이다. 어쨌든 한 번 당했으니 갚아줘야지. 엄마 단점을 말해 주겠다고 했다면서? 엄마 단점은 우리끼리 알자. 아빠도 네 생각에 동의한다.
투혼?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네가 왼쪽 팔에 손을 걸자 아빠가 번쩍 들어올렸잖아. 너는 대롱대롱 매달리면서 깔깔거렸고. 그 모습을 본 엄마가 물었다. "어깨는 이제 괜찮은가 봐?" 맞다. 전날 어깨가 아파서 소염제를 바르고 잤거든. 엄마는 분명히 꾀병 또는 엄살이었다고 생각하겠네. 하지만, 너는 '아빠의 위대한 사랑'으로 기억하렴.
AM-PM 엄마가 11시에 약속이 있다고 하니 너는 AM·PM을 묻더구나. 엄마는 움찔하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AM'이라고 답했지. 잠깐 동안 신중하게 정답을 검토했을 테다. "아, 밤 11시!" 자신 있는 네 반응에 아빠도 움찔했다. 허술하지만 당당한 모습이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