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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4년 8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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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네가 차 뒷자리에서 왜 어린이는 어른이 되고 싶어하고 어른은 어린이가 되고 싶냐고 물었잖아. 그런 철학적인 질문에도 아빠는 늘 준비돼 있단다. "사람은 항상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어." 이어서 어린이어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거, 어른이 아니어서 할 수 없는 거, 어른이어서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도 얘기했지. 결론까지 말하려다 참았단다. 아빠가 또 '열린 결말'을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어린이일 때 장단점이 있고 어른일 때 장단점이 있으니 언제든지 행복하게 살면 되는구나." 네 깨우침이 정말 놀랍고 자랑스러웠다.
선빵2 수학(초띵도 수학이네?) 시험에서 3개 틀려 85점을 받았더구나. 아빠는 애초부터 시험 점수 따위에 신경쓰지 않기로 다짐했거든. 아무렇지도 않았어. 엄마도 신경이 쓰일지언정 티내지 않는 현명함 정도는 갖췄단다. 그런데도 네가 엄마에게 시험지를 내밀며 선빵을 때렸더구나. "엄마, 세상에서 제일 백점을 받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래, 네 마음이 그럴진데 옆에서 긁을 이유가 없지. 네가 중띵, 고띵이 되더라도 그 마음은 잊지 않으마. 그나저나 네 선빵은 참 신선했단다. 아빠도 엄마에게 용기 내서 말하려고. "여보, 세상에서 제일 돈 벌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
써니 학교에서 친구들과 팔찌 4개를 나눠 끼며 '4총사'로 뭉쳤다면서? 슬슬 그럴 때가 됐구나. 그렇게 시작해서 결국 '칠공주'도 되고 '써니'도 되고 그런거지. 그래도 구호는 신선했다. 다 모였을 때 하나, 둘, 셋, 넷 손을 내밀어 모으고 위로 들면서 외치는 구호로 고작 '아자', '화이팅', '얍'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플라워(flower)'라니. 초띵 여학생 감수성인가. 그나저나 네가 좋아하는 친구가 끼고 싶은데 다른 친구들이 싫다고 하면 어쩌겠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에 좀 당황했니? 답을 망설이는 너에게 그때 가서 생각하라니까 정말 편하게 웃더구나. 보기 좋았다.
성탄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학교에서 산타 존재가 화제인가 보구나. 지난해 산타 할아버지가 남겼다며 너에게 줬던 카드를 들고 와서 산타가 한글을 아느냐며 따질 때는 움찔했다. 그 카드가 아직도 있었구나. 순간 아빠가 썼다고 실토할 뻔했어. 여튼, 이미 2년 전에 모든 것을 예상한 아빠는 이미 방대한 세계관을 심어 줬지. 산타 할아버지가 혼자 하루 만에 모든 일을 처리하기 힘들어서 전 세계 곳곳에 일을 돕는 사람을 심어뒀다는 그거. 그래도 내년까지 버티기는 어렵겠다. 너도 몇년 더 선물 받으려면 그냥 모른 척 살아라.
설거지 아빠가 설거지를 하는데 엄마가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더구나. 보일러 껐다고. 너도 잘 알겠지만 사나이는 물 온도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단다. 남자 자존심이지. 덧붙여 설거지할 때 고무장갑을 끼지 않는 것 역시 자존심이지. 엄마에게 이 점을 다시 강조했더니 네가 묻더구나. "아빠, 아빠 자존심이 설거지야?" 아빠가 한참 크게 웃었던 것은 할말이 없어서였다.
앞줄 네 키가 또래 평균에 못 미친다고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거든. 덕분에 학교 예술제 무대에서 합창을 하는데 제일 앞줄 가운데에 설 수 있었더구나. 40명쯤 되는 아이들 속에서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단다. 아빠가 그랬잖아.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라고. 오카리나 연주도, 합창도 연습한 티 많이 나더라. 애썼다.
장난 아빠가 가끔 너를 "이예쥐, 다람쥐, 귀엽쥐"라고 부르는 것은 재밌고, 그렇게 부르면 깔깔 웃는 네 모습이 보기 좋아서이기도 해. 사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더 크단다. "이예쥐, 다람…""하지마!" 단호한 거부 표시에 풀이 죽더구나. 유난히 예민한 너는 아빠 모습이 짠했는지 가까이 다가오면서 조곤조곤 말하더라. "있잖아… 지겨워서 그랬어." 사실 그말이 더 아팠다.
기억력 얼마 전에 안아 올리는데 묵직하더라. 지금도 좋고 앞으로도 한참 자라야겠다만 존재감을 의심할 정도로 가볍던 꼬꼬마 시절이 살짝 스쳤다. "예지야, 너 애기 때 아주 작고 가벼워서 아빠가 네 귓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공중에서 빙빙 돌렸는데 혹시 기억 나?" "아니. 그런데 아빠, 전에는 콧구멍이라면서." 그래, 개뻥도 기억력이 받쳐줘야 뭘 해먹든지 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