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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4년 8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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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답? 네가 며칠 전 선덕여왕이 모란 꽃에 향기가 나지 않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했는 줄 아느냐고 물었잖아. 아빠는 주저없이 나비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어. "땡! 벌과 나비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지." 그래, 벌이 빠졌더구나. 그런데 오늘 너, 엄마에게는 이렇게 묻더라. "신사임당이 모란 꽃에 향기가 나지 않는 이유를 뭐라 대답했는지 알아?" "나비가 없기 때문이지." "딩동댕!" 선덕여왕과 신사임당 차이인가? 아빠는 아직도 땡과 딩동댕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모르겠단다. 그래서 억울하거든.
본능 휴게소에서 산 워터젤리를 먹으며 엄마에게 한입 권하더구나. 그게 바로 효심이다. 다만, 엄마 흡입력을 간과했더구나. 한 번에 쑥 빨려들어가는 젤리를 보고 빨대를 꽉 움켜쥐었지. 그게 바로 본능이다.
경제관념 학교에서 '경제 체험 한마당'이라는 것을 했다지. 벼룩시장 비슷하더구나. 네가 500원을 주고 친구에게 구입했다는 고무딱지 3개를 보고 아빠가 그랬잖아. "다시 1000원 받고 팔면 되겠다." 그런 게 경제 아닌가? 씨익 웃던 너는 의외로 단호하게 답했다. "안 돼. 내 아이디어가 아니잖아." 재벌 나부랭이보다 훨씬 경제 관념이 낫더라.
폭력? 학교에서 3학년쯤 돼 보이는 오빠가 쌍욕을 했다고? 그 말을 듣고 가슴 가운데가 뭘로 찔린 것처럼 아팠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더 아팠다. 게다가 네가 잠시 들고 있던 친구 휴대전화를 빼앗아 너를 콕 쥐어박았다니! 일단 엄마가 선생님께 잘 얘기하겠다고 했으니 그렇게 정리하마. 같은 일이 반복되면 아빠도 가만 있지 않는다. 작은 폭력을 용납하면 더 큰 피해를 낳거든. 그 피해자가 꼭 네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엄마가 속성으로 전수한 '째려보기' 기술은 완성했니? 당했을 때 가만히 있으면, 다음에 또 그래도 되는 줄 알더라. 네 의사 표현을 분명하게 하거라. 뒷일은 엄마·아빠에게 맡기고.
별명 친구들이 불러주는 별명이 없어 스스로 붙인 별명이 '이리'라고? 그래, 동물 이리. 왜 그런 별명을 지었느냐고 물었지만, 이예지에서 '이'를 따서 붙였구나 생각했단다. 초띵 때 정순영 별명이 '순대'였고, 이승환 별명이 '환타'였던 것처럼. "이리는 종종 화를 내고, 수줍음이 많아서 낯선 사람이나 동물을 피하는 게 나와 닮은 것 같아." 별명에 제법 그럴듯한 의미를 담은 게 뜻밖이었고, 고작 8살 어린이가 나름대로 '자기 객관화'를 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어른도 잘 안 되는데.
훌라후프 처음에는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훌라후프를 돌리더니 제법 요령이 붙었는지 허리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더구나. 그냥 잘 돌린다고 칭찬만 하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일까봐 디테일을 추가했다. "아이고, 우리 예지 아기 똥배가 쏙 들어갔네." 수줍게 웃던 네가 훌라후프 RPM을 한 번에 끌어올리더구나. 스칠까봐 약간 쫄았다. 그나저나 적당히 해라. 허리 나갈라.
능숙 네가 아빠는 잘 다루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한 번 만에 알아듣지 못했어. 칼? 기타? 이렇게 예를 들었을 때야 감을 잡았지. 그 질문에 대한 아빠 답은 어렵지 않았어. "엄마?" 옆에서 그 얘기를 듣던 엄마가 입술 끝을 묘하게 들어올리며 웃는 표정은 누가 뭐래도 비웃음이었다. 그런데 깔깔거리며 뒤로 넘어가는 네 모습은 해석하기 어렵더구나.
사과 TV 보면서 뒹굴거린다고 엄마와 약속한 숙제를 쌩깠다면서. 그래놓고도 사과하지 않고 개겼더구나. 어쩐지 살벌한 엄마 포스에 눌려 마지못해 다가간 너는 이렇게 말했다고. "엄마는 좋아하는 사람을 섭섭하게 했을 때 어떻게 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화해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그냥 안 보고 살 거야." "나도 그래." 그렇게 퉁쳤더구나. 엄마는 순간 멍했다더라. 자존심 때문에 사과 한 번 하기 힘들지? 사실 네 엄마도 좀 그렇거든. 엄마 몰래 응원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