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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7년 11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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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인 to 11살 이예지 양 엄마에게 뭐라 했는데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더구나. 아빠가 좀 대충 얘기했고, 엄마도 집중해서 듣지 않았겠지. 뭐라 했느냐고 되묻는데 '다시재생'할 힘이 없었다. 옆에서 듣던 너에게 재생을 부탁했지. 조곤조곤 아빠가 언급하지 않은 예까지 들어가며 완벽하게 말을 옮기더구나. 소통에서 기본은 '성의'라는 것을 다시 생각했다. 아빠 대변인으로 임명하마.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드라이 to 11살 이예지 양 "엄마, 머리를 덜 말리면 청순해 보인다던데.""아니, 게을러 보일 수도 있지." 아가, 드라이해야겠다. 작전실패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첫인상 to 11살 이예지 양 뭐가 불만인지 시무룩한 얼굴을 보다 못해 투 쿠션으로 기술을 걸었다. "예지, 너는 왜 시무룩해도 예뻐? 아빠는 그나마 웃으면 봐 줄만 하고 시무룩하면 완전 밥맛 없는데, 너는 시무룩해도 예쁘고 웃으면 더 예쁘네." 굳었던 얼굴이 반쯤 풀리면서 배시시 웃더구나. 조금 풀렸니? "아빠, 아빠가 그런 건 나에 대한 첫인상이 좋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굳이 설명까지 할 필요는 없었단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연대 to 11살 이예지 양 "요즘 며칠 동안 예지 아이스크림 계속 먹었데이.""아닌데." 부정하는 네 눈가가 벌써 촉촉하더구나. 엄마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는지 금세 정정보도를 했다. "아, 맞다 어제 안 먹었지?"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표정은 침통하더구나. 쉽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빠가 물었다. "아빠는 예지가 아이스크림 계속 먹어도 상관없는데 뭐가 섭섭해?""계속 먹은 게 아닌데 엄마가…" 그래, 아빠는 그 심정 완전 이해한다. 따지고 보면 아빠도 술을 맨날 마시지는 않아. 하루 건너뛰는 날도 분명히 있지. 그런 아빠에게 엄마는 어이없게도 '맨날 술 마신다'며 다그치곤 하잖아. 네 마음이 곧 아빠 마음, 아빠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이제 우리 연대하는 거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2017년 3월 10일 to 11살 이예지 양 2012년이었으니까 네가 6살 때였나. 아빠가 이런 말을 남겼더구나. "너는 원칙과 상식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라. 그것은 당연히 딛고 버틸 땅이지 애써야만 따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다." 그 당연한 것을 누린다는 게 그렇게 또 힘들구나. 많이 늦었다만 오늘부터라도 그런 땅에 네 작은 발을 디뎠으면 한다. 사랑한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천재 to 11살 이예지 양 사람이 그렇다. 함께 살다보면 변화라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한단다. 너는 부쩍 자랐건만 정작 6살 이예지 양과 11살 이예지 양 차이는 뭔가 계기가 있어야 알아채곤 한단다. 이를테면 끼니를 제때 채우지 못한 아빠가 집으로 들어가면서 엄마에게 밥 말고 안주 비슷한 거 없냐고 단톡방에서 물었잖아. 엄마는 고기, 소세지, 만두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고. 진정 자애로운 메뉴에 허우적거리며 고민에 빠진 순간 네가 냉큼 답글을 달더구나. "안주는 소세지 아니면 만두지." 네가 어찌 그렇게 확신에 가득 찬 답글을 달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답글을 본 순간 아빠 느낌은 이랬다. 천재 아니야?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수학 to 11살 이예지 양 재주 많고 심성 바른 네가 수학을 힘겨워한다는 게 어떤 면에서 다행이다. 잘 읽고 잘 그리는 것만 해도 어디냐. 하찮은 약점 하나가 앞으로 너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어쨌든 오랜만에 받은 네 메시지는 반가웠다. "오늘 전개도를 배웠는데 난생 처음 수학이 미술같았다능 >3
편애 to 11살 이예지 양 하얀 웃옷을 입고 뭘 먹는 것을 보면 괜히 불안하다. 김칫국물, 라면국물 같은 게 튀면 치명적이잖아. 옷은 빨면 그만이지만 그 상황을 그냥 넘기는 엄마가 흔하지는 않다. 며칠 전 친구들과 포도주스를 마실 때 옷에 주스를 흘린 너를 보고 친구가 깜짝 놀랐다면서? "헉!""왜?""너네 엄마는 옷에 뭐 묻히면 뭐라 안 해?""뭐라 안 하는데.""너네 엄마 진짜 친절하시구나.""너네 엄마는 안 친절해?" 그러니까 그런 친절이 드물단다. 엄마는 너에게, 너에게 만은 진짜 친절하다. 너에게는 말이다! from 자애롭고 꼼꼼… 아니, 샘난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