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7/10

(22)
자숙 며칠 만에 만난 엄마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좀 세게 물어버렸어. 상처가 날 정도로. 화난 엄마는 덩치만 큰 아빠 양반보다 훨씬 무서운 것 같아. 정말 식겁했거든. 가끔 아빠 양반이 엄마에게 짜증을 내거나 덤빌 때가 있는데 아주 무모해. 얄랑궂은 자존심 좀 세우려나 본데 대체로 결과가 나빠. 잘못했으면서 욕 먹지 않는다고 자존심이 서는 게 아니지. 아빠 양반은 자존심은 인간보다 한참 높지만 잘못하면 바로 자숙할 줄 아는 고양이 태도를 보면서도 좀처럼 배우는 게 없나 봐. 야옹.
추석 아빠 양반 부모 만나러 온 식구가 떠난다고 해. 며칠 동안 이 집을 접수하게 됐어. 워낙 고결한 품성과 자태 덕에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고양이도 당연히 부모가 있어.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안다고 외로움을 원하는 것은 아니야. 아빠 양반은 일년에 한두 번 자식 노릇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핵심은 그 며칠 빼고 자식 노릇을 별로 하지 않는 데 있지. 어쨌든 잘 다녀왔으면 좋겠어. 화장실에 쌓일 응가를 생각하니 벌써 불쾌하거든. 야옹.
핵심 오랜 연을 귀하게 여기고 가꾼 지인들과 잠깐 만나 명절에 앞서 정을 나누고 서로 삶을 북돋는 자리에 나서는 아빠에게 엄마가 묻더구나. “술 마시러 가면서 가방은 왜 들고가?”“지갑, 휴대폰 손에 들고 다니다가 어디 떨굴까 봐.” 뭔가 설명이 부족했니? 네가 다시 묻더구나. “아빠, 가방까지 떨구면?” 역시 핵심은 따로 있더구나. 날카로웠단다. 칭찬 먼저 하고 질문에 답하자면, 엄마에게 뒈질 것이야.
절제 절제는 고양이라면 타고난 소양이야. 우리는 그릇에 밥을 많이 담아둔다고 배터지도록 처먹지 않아. 적당히 허기를 채우면 식사를 그칠 줄 알지. 인간은 가진 것은 하찮게 여기고 갖지 못한 것에는 집착하는 것 같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또 환장하지. 아빠 양반이 모니터를 보면서 비싼 차를 뒤적거리는 거 보면 참 한심해. 그나저나 아빠 양반, 여기 공 좀 꺼내 봐. 이게 왜 가질 수 없게 돼 있나. 성질 나게. 야옹.
색깔 "아빠는 무슨 색깔이 좋아?" 짙은 파란색이라고 답하려다 한 번 더 고민했다. 미술을 좋아하는 네가 색 취향을 물었는데 빨주노초파남보 중에 하나를 답할 수는 없잖아. 어쩐지 없어 보일 수 있겠다는 감이 스쳤단다. 뭔가 양념이 필요했지. "혹시 인디고 블루 알아? 아빠는 그 색이 좋던데.""오! 나도 좋아하는 색인데. 아빠, 코발트 블루도 좋아하겠네." 일단 살짝 감탄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런데 코발트 블루는 뭐냐?
욕설 한심한 인간들이 그나마 상식은 있구나 싶을 때가 욕 앞에 멍멍이를 붙일 때지. 품위, 교양, 자태 뭘 따져도 고양이는 욕과 어울리지 않아. 억지로 붙여도 말이 안 돼. ‘이런 개 같은’과 ‘이런 고양이 같은’이 같아? 심지어 ‘고양이 같은’은 칭찬처럼 들리잖아. 그런데 아빠 양반이 뭐라는 줄 알어? 고양이가 세 글자라서 욕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고양이가 아니라 ‘고’였다면 욕 앞에 썼다면서. 강아지를 욕 앞에 쓰지 않는 이유와 같다네. 그게 어떻게 같냐고! 완전 미쳤어.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