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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2년 6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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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하루 일과를 그린 그림을 봤다. 치카치카를 하고, 책을 읽고, 잠을 자는 등 순서대로 정리한 그림이 신기하더구나. 그냥 6살 어린이처럼 내키는 대로 살면 되지 왜 시키지도 않은 약속을 그림으로 그리는 이유를 모르겠더라. 어쨌든 약속 옆에 그린 아이콘은 진짜 기발하면서 웃겼다. 예사롭지 않은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확인 네가 요즘 유난히 사랑을 측정하고 싶고, 비교하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더구나. 엄마에게 사랑하느냐고 묻고 묻고 또 묻고. 하기야 아빠도 늘 확인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란다.
첫 통화 태풍이 몰아치던 날 아빠는 출장 중이었다. 집이 걱정돼 전화했더니 네가 받더구나. 엄마가 바꿔 준 적은 있어도 네가 바로 전화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예지가 전화 받았어?" "응." "엄마는?" "화장실 갔어." "안 무서워?" "응." "용감하네, 창문 안 흔들려?" "조금 흔들려." "안 무서워?" "응" "바람 많이 안 불어?" "바람 조금 불어." "안 무서워?" "응. 아빠, 그런데 왜 물어본 거 자꾸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왜 자꾸 같은 질문을 했을까.
인류애 "아프리카 새깜둥이 마마똥꾸 고릴라 돼지고기 삼겹살" 네가 신나서 흥얼거리는 말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아프리카 새깜둥이'라는 표현은 계속 마음에 걸리더구나. 괜히 검은 피부를 놀리는 것처럼 들렸거든. 피부 색은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아프리카 친구를 놀리는 것처럼 들려서 좋지 않다고 했고, 네가 선뜻 동의해서 흐뭇했다. 며칠 뒤 뭐가 신났는지 '아프리카 새깜'까지 하다가 얼른 입을 막더구나. 아빠 말을 기억해서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한 번에 들었던 기억이 별로 없었네.
언감생심 아빠를 우주만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순간 자신감마저 우주만큼 치솟더구나. 그게 지나쳐 그동안 넘보지 못했던 아성을 한 번 깨려 했던 게 실수였나 보다. "우주만큼? 그러면 엄마는?" "엄마요? 엄마는 우주보다 더 사랑해요." '우주보다 더'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게 바로 아빠와 엄마 차이였구나. 박명수와 유재석 차이고 2인자가 1인자를 함부로 넘보면 안 되는 이유지. 실망했다만 좋은 것 하나를 배웠단다.
홍보 거실에서 뒹굴거리던 네가 무슨 바람인지 널브러진 인형을 정리하기 시작하더구나. 깔끔해진 거실을 보면서 칭찬을 아낄 수 없었다. 너도 상당히 뿌듯해 하더라. 하지만, 뭐가 아쉬운지 주변에서 계속 서성이는 이유를 알아채기는 어려웠어. "아빠, 내가 정리한 거 사진 찍어서 엄마한테 문자로 보내줘도 괜찮은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기는커녕 오른쪽 새끼발가락까지 알게 하는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단다.
체크 너에게 아빠가 5순위 정도 될까?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다음에 아빠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침에 아빠가 안 보이면 체크하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는 개구쟁이지만 엄마 옆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이 말을 전해듣고 한참 웃었다. 개구쟁이? 그래, 장난꾸러기도 괜찮고 심술쟁이도 괜찮다. 옆에 계속 있으면 좋겠다는 말에는 계속 흐뭇하더구나.
소외 네가 엄마에게 푹 안길 때만 해도 미처 '사랑 배틀'이 길게 이어질 줄 몰랐다. "엄마 사랑해.""엄마도 예지 너무 사랑해.""나도 엄마 너무 너무 사랑해.""엄마도 예지 너무 너무 너무 사랑해.""나도 엄마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사랑해.""엄마도 예지 너무 너무 너무 너무무무무 사랑해." 이 행복한 장면에 끼고 싶은 게 큰 욕심은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아무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이겠지. "아빠도 예지 사랑해.""나도 알아." 이 반응이 섭섭하지 않다면 그 또한 거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