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편지/2013년 7살

(49)
민주주의 엄마에게 눈이 반쯤 감긴 상태에서 항의했다면서. 너에게는 일찍 자라면서 엄마는 TV 보고 늦게 잔다고. 많이 억울했겠더라. 하지만, 네 엄마는 그 정도로 당황하지는 않지. "엄마는 성장호르몬이 하나도 없지만 예지는 아직 성장호르몬이 많이 있고, 성장호르몬은 자는 동안에만 나오기 때문에 예지가 일찍 자야 키도 크고 예뻐지지. 엄마는 일찍 자도 성장호르몬이 나오지 않아." 드라마쟁이 치고 논리가 완벽하지? 너는 오해했다며 바로 잠자러 갔다고 하더구나. 우리집 민주주의는 토론과 설득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보다.
보너스 네가 갑자기 보너스가 뭐냐고 묻더라. "예지가 아이스크림 두 숟갈만 먹기로 약속했는데, 오늘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아빠가 한 숟갈 더 먹으라고 하면 그게 바로 보너스지." 미리 준비한 듯한 매끄러운 설명 어땠니? "진짜 좋은 거네. 아빠 회사에서도 보너스 줘?" 당연히 보너스 주지. 그나저나 너 정말 보너스가 뭔지 몰랐니?
우리말 네가 말끝마다 대들자 늘 너그러운 엄마도 견디지 못했나 보더라.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음부터 뭐 안 해준다!" 풀이 죽어서 방에 콕 처박힌 모습이 좀 짠했다. 너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펑펑 울면서 하소연 했지. "그러면 앞으로 나오지 말라는 말이야? 유치원은 어떻게 가라고? 방에서 나오면 안 되는 거야?" 그래, '이런 식으로 나오면'이라는 말이 그렇게 들렸나 보구나. 사실 우리말이 좀 어렵기는 해.
밀땅 아빠가 팔을 있는 힘껏 뻗으며 손가락을 쭈욱 내밀어서 너를 불렀을 때, 너는 딱 손가락만 펴서 아빠 손가락과 끝을 맞추더구나. 연애는 참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자존심? 어제 날짜를 묻기에 왜 오늘 날짜가 아니라 어제 날짜를 묻는지 궁금했다. 혹시나 해서 오늘 날짜가 필요한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어제'라고 하더구나. "22일." "아, 오늘은 23일이구나." 자존심이 참 강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불공정 네가 엄마에게 울상을 하고 뭐라 얘기하는 중에 '불공평해'만 겨우 들었다. 내용은 모르겠으나 그런 세상을 용납할 수는 없지. "엄마는 시원하게 긁고, 나는 가려운데 긁으면 안 되고." 말은 알아들었는데 뭘 엄마는 시원하게 긁고 너는 못 긁는지 눈치채지 못하겠더구나. 그럴 때는 확실히 엄마가 빨라. 갑자기 뒹굴거리며 웃던 엄마는 손으로 조그맣게 네모를 그렸다. 아! 신용카드. 그래, 엄마는 시원하게 긁겠다고 하고 너는 긁지 못하게 하고, 불공평하네. 아빠도 엄마가 그렇게 긁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너는 늘 공평한 세상에서 살거라.
잠투정 네 유치원 가방에 뭐가 가득 들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냥 뭐가 들었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왜 궁금하냐고 앙칼지게 받아치니 참. 아빠 성격도 그렇게 좋지 만은 않단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으니 너도 앞으로 궁금한 거 묻지 마."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너는 일부러 그렇게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며 훌쩍거리더구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화해하려 했더니 너는 소파에서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그냥 잠투정이었네. 똘망똘망 말도 잘하고 하는 짓도 야무져서 가끔 잊게 되네. 너는 이제 겨우 만 여섯 살도 되지 않은 아이일 뿐인데.
역차별 아빠가 차에서 내리면서 네 가방과 엄마 가방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랗고 묵직한 봉투, 아빠 가방 두 개까지 포함해서 모두 양손에 들었잖아. 네 손에는 달랑 인형 한 개 뿐이었고. 엄마는 그냥 긴 종이상자 하나, 그것도 속이 비어 있는 상자 하나를 들었을 뿐이었단다. 너는 계속 엄마에게 도와주겠다, 같이 들어주겠다며 달라붙더구나. 엄마는 거듭 괜찮다고 했지. 그제야 아빠가 정말 조심스럽게 도움을 요청했거든. "아빠는 힘이 세잖아." 그냥 무시하더구나. 섭섭하지 않으려 꽤 노력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