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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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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엘리베이터에서 할아버지가 타니 인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표정도 영 떨떠름한 게 좀 그렇더라. 내릴 때도 인사하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가더구나. “예지, 저 할아버지 알아?” “아니, 몰라. 왜?” “예쁘게 인사하는데 받아주지도 않아서. 기분 나쁘네.” “내가 인사하는 게 중요한 거지. 받아주는 것은 할아버지 마음이고.” 대인의 풍모를 느꼈단다.
자만 "자신감과 자만심 차이가 뭐에요?" 요즘 질문이 고급져서 참 좋다. 자신감은 자기 능력을 믿는 마음이고, 자만심은 자기 능력을 뽐내려는 마음 같은 흔한 답을 원했다면 아빠를 찾지도 않았겠지. "좋아하는 사람이 잘난 척하면 자신감, 미워하는 사람이 잘난 척하면 자만심이지 뭐.""그런가?" 정답은 네가 또 찾거라.
성차별 "안 추워?" 밤에 티셔츠 한 장 달랑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온 아빠가 없어 보였니? 아빠는 그렇게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란다. 쌀쌀한 기운을 약간 즐기기도 하고. “강한 남자라서 괜찮아.”“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야.”“왜?”“남자니까 어떻고 여자니까 어떻고 하는 것은 성차별적 발언이야.” 네 지적이 더 오싹했단다.
심쿵 갑자기 품으로 달려들더니 이마로 가슴팍을 들이받더구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네가 씨익 웃으며 하는 말에 당황했다. “심쿵!”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에 적확한 말이다만, 이럴 때 쓰는 말이 맞기는 맞냐?
잘 맞았던 청바지가 꽉 끼인다며 끙끙거리더구나. 앉았다 일어섰다 몇번 하면서 불편해 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그래도 그런 불편 속에서 장점을 찾을 수 있어야겠지. “예지, 핏이 사네.”“핏? 핏이고 자시고!” 바지를 벗어 던지더구나. 그래, 핏이고 자시고! 어쩐지 후련했단다.
핵심 오랜 연을 귀하게 여기고 가꾼 지인들과 잠깐 만나 명절에 앞서 정을 나누고 서로 삶을 북돋는 자리에 나서는 아빠에게 엄마가 묻더구나. “술 마시러 가면서 가방은 왜 들고가?”“지갑, 휴대폰 손에 들고 다니다가 어디 떨굴까 봐.” 뭔가 설명이 부족했니? 네가 다시 묻더구나. “아빠, 가방까지 떨구면?” 역시 핵심은 따로 있더구나. 날카로웠단다. 칭찬 먼저 하고 질문에 답하자면, 엄마에게 뒈질 것이야.
색깔 "아빠는 무슨 색깔이 좋아?" 짙은 파란색이라고 답하려다 한 번 더 고민했다. 미술을 좋아하는 네가 색 취향을 물었는데 빨주노초파남보 중에 하나를 답할 수는 없잖아. 어쩐지 없어 보일 수 있겠다는 감이 스쳤단다. 뭔가 양념이 필요했지. "혹시 인디고 블루 알아? 아빠는 그 색이 좋던데.""오! 나도 좋아하는 색인데. 아빠, 코발트 블루도 좋아하겠네." 일단 살짝 감탄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런데 코발트 블루는 뭐냐?
성장 속도 엄마가 야근이라며 집에 일찍 와서 너를 챙겨달라더구나. 그러기로 했다. 엄마가 마음이 놓였는지 메시지로 고급 정보도 보냈단다. ‘집에 치킨 있어요~’ 뭐가 됐든 안주가 있다는 것은 술 마시는 평범한 아빠들에게 복음이지 뭐. 집에 도착하니 역시 치킨이 있더구나. 뼈다구만 한 접시. “학교 마치고 와서 배고파서 먹었어.” 그래, 잘했다. 그나저나 엄마는 네 성장 속도를 도대체 어떻게 계산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