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편지

(415)
수컷 유치원에서 같은 반 남자 친구에게 사탕을 받아왔더구나. 그 친구가 너에게 내일 자기 먹을 것도 하나 달라 했다고? 낯선 아이에게서 수컷 향기를 느꼈단다. 다음 날 아침 친구 사탕까지 챙기는 엄마 모습이 재밌었다. 너는 그렇게 금세 자라고 또 자라는가 보다.
체벌 자식은 매로 키운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너를 단 한 번도 체벌한 적은 없다. 왜 그랬을까. 언젠가 너에게 화를 냈더니 당황스러울 정도로 벌벌 떨더구나. 엄마는 감정 조절 실패라며 아빠를 원망했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야단을 치는 목적이 뭐지? 잘못을 고치는 것인가, 잘못을 고친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며칠 뒤 엄마가 아이에게 말하는 법을 안내한 책을 한 권 주더구나. 읽고 고민 많이 했단다. 그래도 잘하는지 모르겠다만.
변신 엄마 따라 미용실을 간 아기가 소녀가 돼서 왔더구다. 깜짝 놀랐단다. 아빠가 감각이 좀 무디고 그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낮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정도는 안다.
반창고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 아빠에게 성큼 다가오더구나. 피가 무섭지 않았니? 순간 당황했단다. "어쩌다 그랬어? 조심하지. 나도 어릴 적에..." 딱 엄마가 너를 어르고 달래는 그 말투더구나. '어릴 적'이라는 말에는 그냥 웃음이 터질 뻔했다. "네 어릴 적이면 언제야?""4살." 대답도, 반창고 붙이는 솜씨도 야무지구나. 고맙다.
재롱발표 유아(3~5세) 시절을 마감하는 '재롱발표회'를 조마조마하면서 봤다. 참여하는 모습이 무척 대견했단다. 고만고만한 애들 가운데 끼어 앉은 작은 너를 어떻게 찾았을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빠도 엄마도 어쩔 수 없이 너만 덩그러니 보였으니까. 참 멋졌다.
해결사 3년 만기 대출금을 털었다. 체감 월급 30만 원을 인상한 셈이지. 능력 있는 아빠는 가만히 앉아서 회사가 월급 올려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어쨌든 달마다 생길 30만 원 용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자를 할까 기부를 할까 고민하는데 엄마가 야무지게 말하더구나. "예지 올해 유치원 가거든." 잊지 말거라. 언제나 엄마는 해결사란다.
외출 단둘이 외출은 처음이었다. 아빠가 선택한 곳은 집과 가까운 놀이동산, 놀이동산과 가까운 미술관이었지. 늘 수줍어 하던 네가 그렇게 즐겁고 고마운 표정을 대놓고 드러낼 줄 몰랐다. 엄마도 느닷없는 부녀 외출을 추켜세웠단다. 좋은 아빠가 된다는 게 이런 것인가 했다. 그날 저녁 너는 끊임없이 기침을 하며 골골거리더구나. 퀭한 눈과 마주쳤을 때는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딸과 잘 노는 좋은 아빠이고 싶었는데 딸을 앓게 만든 몰상식한 애비가 됐더구나. 평소라면 억울했을 텐데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