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편지

(415)
본심 TV 영화 채널을 한참 보는데 스윽 다가오는 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아빠, 그게 재밌어?" "응, 재밌어." "난 EBS랑 KBS키즈가 재밌어." 리모콘을 넘겨야겠더구나. 그나저나 처음부터 EBS나 KBS키즈 보고 싶다고 말하면 안 되겠니? 대화 스타일이 엄마더라.
추억 가지고 놀지 않은 채 쌓이기만 하는 장난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너에게 상자를 주며 필요 없는 것과 부서진 장난감을 골라내라 했지. 한 시간 정도 신중하게 검토하던 너는 플라스틱 그릇 하나, 작은 탬버린, 용도를 알 수 없는 부서진 장난감 등 딱 3개만 내놓더구나. 대충 봐도 50개는 넘게 버려야겠던데 말이다. 너는 이 장난감은 누구와 함께 갖고 놀았고, 이 장남감은 누가 사줬고, 이 장난감은 누구에게 얻었고 한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저마다 사연 없는 장난감은 없더라. 아빠가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구나. 그래도 다음에 한 번은 제대로 정리하자.
더더더 네 애정 표현이 점점 거창해지는구나. 아빠 처지에서 나쁠 게 없지. 다만, '하늘만큼'으로 시작해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우주보다 더' 이후에 더 나올 게 있는지는 궁금했다. "아빠, 내가 엄마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 "글쎄." "아빠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나저나 그 표현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위로 엄마 나이는 알겠는데 아빠는 몇 살이냐며 갑자기 물어서 놀랐다. 느닷없이 호적을 까라니 말이다. "어? 엄마보다 적네. 그래도 아빠가 키도 크고 힘도 세잖아. 나이가 적다고 마음이 작은 것도 아니고." 공감한다. 단지 왜 그런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더라.
약속 하루 일과를 그린 그림을 봤다. 치카치카를 하고, 책을 읽고, 잠을 자는 등 순서대로 정리한 그림이 신기하더구나. 그냥 6살 어린이처럼 내키는 대로 살면 되지 왜 시키지도 않은 약속을 그림으로 그리는 이유를 모르겠더라. 어쨌든 약속 옆에 그린 아이콘은 진짜 기발하면서 웃겼다. 예사롭지 않은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확인 네가 요즘 유난히 사랑을 측정하고 싶고, 비교하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더구나. 엄마에게 사랑하느냐고 묻고 묻고 또 묻고. 하기야 아빠도 늘 확인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란다.
첫 통화 태풍이 몰아치던 날 아빠는 출장 중이었다. 집이 걱정돼 전화했더니 네가 받더구나. 엄마가 바꿔 준 적은 있어도 네가 바로 전화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예지가 전화 받았어?" "응." "엄마는?" "화장실 갔어." "안 무서워?" "응." "용감하네, 창문 안 흔들려?" "조금 흔들려." "안 무서워?" "응" "바람 많이 안 불어?" "바람 조금 불어." "안 무서워?" "응. 아빠, 그런데 왜 물어본 거 자꾸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왜 자꾸 같은 질문을 했을까.
인류애 "아프리카 새깜둥이 마마똥꾸 고릴라 돼지고기 삼겹살" 네가 신나서 흥얼거리는 말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아프리카 새깜둥이'라는 표현은 계속 마음에 걸리더구나. 괜히 검은 피부를 놀리는 것처럼 들렸거든. 피부 색은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아프리카 친구를 놀리는 것처럼 들려서 좋지 않다고 했고, 네가 선뜻 동의해서 흐뭇했다. 며칠 뒤 뭐가 신났는지 '아프리카 새깜'까지 하다가 얼른 입을 막더구나. 아빠 말을 기억해서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한 번에 들었던 기억이 별로 없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