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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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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손가락 사이 (주부)습진이 생긴 아빠에게 엄마는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라 했잖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분홍색 고무장갑은 무슨!" 그냥 맨손으로 했단다. 싸나이 아니겠니! "아빠, 그런데 고무장갑이랑 자존심이 무슨 상관이야?" 날카로움 인정! 그러니까 아빠 말에서 유머 포인트는 어차피 설거지를 할 거면서 고무장갑을 핑계로 남자 자존심 운운하는 데 있단다. 아직은 좀 어려울 것이다.
성전환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설거지 얘기를 하다 보니 엄마 속 남성성과 아빠 속 여성성까지 얘기하게 됐네. 그나저나 성전환에 대한 네 생각이 갑자기 궁금했다. "물론, 자기 그대로 모습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 자기 모습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이 정도 답도 충분한데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너무 궁금했거든. "남자가 여자, 여자가 남자로 바뀌면 친구들이 놀리지 않을까?""그런 걸로 놀리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잘 못할 거 같아." 아!
주문 저녁 메뉴를 물었잖아. 엄마가 끓여놓은 국도 있고 카레도 있고. 반응이 시원찮아서 피자나 치킨 같은 거 먹고 싶느냐고 물었더니 잠시 망설이던 네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오늘 학원 마치고 나오는데 1층에서 치킨 냄새가 좋았어." 솔직히 아빠는 이 같은 여성 동지들 표현 방식이 너무 어렵고 힘들단다. 어쨌든 설득력은 쩔었다. 주문 직전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외치는 타이밍도 괜찮았고.
게임 라는 스마트폰 게임을 하더구나. 예부터 아빠 주변 아빠들은 게임과 전쟁에서 처참하게 당한 사연을 종종 하소연했다. "예지, 마인크래프트가 예지 베스트 게임 중에 몇 등이야?""마크? 4등?" 1~3등이 더 있어 당황했다. 게임이 궁금해서 설명을 부탁한 것은 아니었단다. 어쨌든 30분 동안 신나게 게임을 설명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와! 진짜 재밌겠네. 마크가 4등 할 만하네. 아빠도 해보고 싶다. 다음에 또 설명해 줘. 그리고 오늘은 좀 쉬고.""네!" 스마트폰을 놓으니 숙제 생각이 났나 보구나. 어쨌든 이게 아빠 방식이란다. 언제까지 통할지는 모르겠다만.
코디 너 아기 때부터 몸에 열이 많았잖아. 웬만한 추위는 그냥 무시하고, 밤에 자다가 이불 걷어차기 일쑤고. 집에서도 걸핏하면 갑갑하다며 옷을 벗고 다녔잖아. 차에 히터 틀면 창문 열기 바쁘고. 얼마 전 엄마가 사 준 러시아에서도 버틸 것 같은 외투는 진짜 마음에 드나 보다. 추우면 당연히 입고 가고, 덜 추우면 앞에 지퍼 열고 입으면 된다고 하고, 더우면 벗고 있으면 된다면서 입고 나가고. "예지야, 오늘은 포근한데. 그 외투 입으면 진짜 더울 텐데.""엄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 추울 수도 있잖아." 진짜 마음에 드나 보다.
사고와 장난 달마다 한 번씩 자리를 바꾼다며? 주변에 앉은 사내들이 예사롭지 않은가 보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걱정하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얘는 장난을 많이 치고, 쟤는 말이 너무 많고, 얘도 장난을 많이 치고, 얘는 사고를 많이 치고." 힘든 나날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장난치는 것과 사고치는 것은 뭐가 다른 지 궁금했다. 그것을 왜 모르느냐는 표정으로 답하길래 움찔했단다.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데 선생님한테 혼나면 사고, 혼나지 않으면 장난이야." 아주 깔끔했단다.
드라마 치킨을 뜯던 네가 느닷없이 던진 명제가 흥미로웠다. "아빠, 드라마는 똑같은 거 같어.""뭐가?""경찰이 나와. 범죄가 있어. 그리고 연애해. 의사가 나와. 환자가 있어. 그리고 연애해. 부자가 나와. 사람을 만나. 그리고 연애해. 다 그래." 제대로 봤구나! 아빠는 그 똑같은 구조가 별로란다. 엄마는 경찰, 의사, 부자마다 다른 디테일에 흥미를 느낄 것이고. 드라마보다 이 좋다는 네 단호함이 꽤 맘에 든다.
충돌 학교에서 친구와 부딪혔다며? 이마에 희미한 자국이 있는 것으로 봐서 꽤 충격이 컸나 보더구나. 친구는 뒤통수를 움켜쥐며 뒹굴었다고. "아빠, 내 실수도 있지만 옆에서 다른 친구들이 나보고 잘못했다고 계속 얘기해서 더 속상했어." 일단 참치캔 두 개로 왜 추돌 사고 때는 100% 뒷차 책임인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다행히 잘 알아듣더구나. 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문제는 옆에서 계속 잘못했다고 얘기했던 친구들인데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늘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해. 누구나 인정하는 빼어난 재주가 있으면 괜찮은데 그런 재주라는 게 또 누구에게나 있지는 않거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게 훨씬 쉬운 방법이야. 그렇게 내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