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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3년 7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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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볶음밥을 먹기 좋은 크기로 김에 싸서 너에게 주니, 너는 소금 뿌린 김이 아니라며 미식가처럼 굴더구나. 웬만하면 그냥 먹지. 마침 작은 종지에 들어 있는 간장이 식탁에 있길래 살짝 찍어 먹기를 권했지. 맛있게 몇 개를 찍어 먹던 너는 종지를 내밀며 비밀을 알려 주더구나. "아빠, 이거 딸기쨈." 참 달콤했겠다. 그게 왜 구분이 안 됐을까.
섹시 네가 아무 도움 없이 옷을 챙겨 입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그런 게 바로 성장이지. 세수하고, 머리 빗고, 양말 신고, 티셔츠 입고, 원피스 디자인인 유치원복을 입더니 아빠에게 뚜벅뚜벅 다가오더구나. 그리고 등을 보이면서 두 손으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위로 들어올렸지. 아! 지퍼. 아가, 제법 섹시했단다.
발음 앞니 두 개를 뺀 네가 아빠에게 '[θ](뜨·쓰)' 발음이 안 된다고 했잖아. 아가, 아빠는 앞니에 임플란트 하고 스켈링 하고 금을 씌워서 가그린을 수십번 한다고 해도 그 뻔데기 발음은 안 된단다.
뻥쟁이 장난감 거북을 보여주면서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거북'으로 소개하더구나. 그 정도로는 아쉬웠는지 토끼보다 빠르고 차보다 빠르다고 목소리를 높였지. 그런 거북은 듣도 보도 못한 아빠는 그 거북이 왜 그렇게 빠른지 궁금했다. "원래 그렇게 태어났거든." 거북 '성속설(性速說)'이니? 요 뻥쟁이!
한계 아빠가 너에게 손바닥 만한 유치원 가방을 들게 했던 것은 아빠도 엄마도 짐이 많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엄마는 가방을 다시 낚아채더구나. 나중에 질리도록 짊어질 거라면서. 다시 엄마에게 네 가방을 받아들며 아빠가 아무리 자애롭고 꼼꼼하더라도 거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학습 요즘 네 말투가 유난히 사납고 짜증스러울 때가 있더라. 그래서 엄마에게 네 말투가 왜 그렇느냐고 물었지. 엄마는 1.8초 만에 누구한테 배웠겠느냐고 되묻더라. 그날 너를 안아주며 아빠가 했던 말 기억하니? "아빠도 기분 나쁘고 화나고 짜증날 때 말을 밉게 하는데, 될 수 있으면 그러지 않을 테니 예지도 말을 밉게 하지 말자."
순간포착 사진에 별로 취향이 없는 아빠가 까다롭고 새침한 너를 사진에 담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단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표정을 잡아내는 것은 글쎄… 소녀시대 9명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늘어놓는 것보다 버거운 일이거든. 그걸 네가 알지는 모르겠다만.
상투적 너와 오랜만에 단둘이 밤길을 걷던 날, 너는 환한 낮도 좋지만 깜깜한 밤도 좋다고 했지. 예쁜 별을 볼 수 있으니까. 뭐 아무것도 아닌 말인데 괜히 마음이 녹고 세상이 따뜻해지고 그렇더라. 그럼, 밤도 괜찮지. 그나저나 이런 상투적인 멘트조차 마음에 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