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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3년 7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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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제 네가 엄마에게 진짜 어려운 문제라며 1002 더하기 1000을 물었을 때 이과 출신 아빠는 문과 출신 엄마가 괜히 걱정됐다. 다행히 엄마는 2002를 계산해내더구나. 그런데 왜 정답 확인을 해주지 않니? "몰라, 진짜 어려운 문제거든." 아! 그렇구나. 네가 답을 알았다면 '진짜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
역지사지 유치원에서 처음 보는 남자 애가 너보고 키가 작다고 했다며? 의연하게 '나는 원래 작다'고 받아쳤다기에 조금 놀랐다. '선빵'을 당하고도 당황하지 않고 받아친 것은 높게 평가한다. 그래도 교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처음 보는 친구 외모를 막 평가하고 놀려도 되는 거야?" "아니, 걔도 자기가 놀림을 당했으면 그렇게 못 했을 텐데." 그 정도면 훌륭하다.
처세 엄마가 만든 피자를 맛나게 먹던 네가 갑자기 물었다. "엄마가 만든 피자가 왜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아?" 조금 당황했다. 2년 전 아빠가 같은 질문을 너에게 한 적이 있었거든. 어쨌든 이유가 뭐니? "엄마 정성과 사랑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 그래, 맞는 말이다. 다만, 2년 전 같은 질문에 대한 네 답은 '프레스코 소스'였거든. 정치적으로 성숙한 것 같아 아주 마음에 들었단다.
이심전심 네가 MBC 을 재밌게 보는 게 참 신기하다. 멤버들이 여고생과 짝을 맞춰 MT를 떠나는 내용이었는데 저녁에 하는 게임이 재밌더구나. 여고생이 짝이 된 멤버에게 몸짓으로 요리를 설명하면 짝이 그 요리를 짐작해 조리해서 갖고 오는 게임. "예지, 먹고 싶은 거 몸으로 설명해 봐." 시켰지만 별 기대는 없었다. 어떤 조건을 걸어도 하기 싫으면 절대 하지 않는 네 성격을 잘 알거든. 그런데 슬며시 일어선 네가 손가락 두 개를 입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더니 입에 손부채질까지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벌떡 일어나 라면을 끓였지. 부엌을 빼꼼 들여다보던 네 표정이 참 해맑더구나.
위엄 최소한 너에게는 늘 상냥한 엄마와 한바탕 하고 나서 머쓱하게 엄마에게 내민 편지 잘 봤다. "엄마 미안해요. 아까 내가 속상해서 그랬어요. 말을 잘못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아빠랑 이야기했는데 화내는 않는 방법을 가르쳐 줬어요. 사랑해요." 자질구레한 설명 따위는 필요 없다. 교육이 낳은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단번에 알 수 있더구나. 고맙다.
예리 라면 좋아하는 네가 먹는 모습은 어쩐지 어색하더구나. 젓가락으로 면을 집으면 밑에서부터 입에 넣더라. 흔들리는 면발을 입이 쫓느라 힘들고, 국물 떨어져서 지저분하고. 아빠가 냉큼 먹는 시범을 보여줬지. "아빠, 아빠 라면으로 보여줘도 되는데." 그래, 아빠 라면은 이미 다 먹고 없다. 핵심을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모습이 대견하더구나.
오해 아침에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는지 네 표정이 시큰둥했다. 하는 말마다 밉살스러웠고. 보다가 영 아니다 싶어 이유를 물었더니 밉게 얘기한 적 없다고 딱 잡아떼더라. 밥을 먹으면서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예지가 밉게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예지는 밉게 얘기한 게 아니라고 했잖아. 어디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그러자 너는 손가락을 쭈욱 내밀며 소파 뒤를 가리키더구나. "저기, 저기서 그랬잖아. 기억 안 나?" 그러니까 아빠가 궁금한 것은 장소가 아니었다.
해결책 실뜨기가 생각대로 안 되자 너는 울음을 터뜨리더구나. 얼른 마음이 상하지 않는 해결책을 제시했지. "실뜨기를 하지 않으면 돼." 순간 황당하게 바뀌는 표정이 우스웠다. 잠시 생각에 잠긴 네가 내놓은 답이 더 정답이더구나. "아빠, 잘 안 될 때는 한 번 더 해보고, 안 되면 다음에 한 번 더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