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편지/2015년 9살

(94)
본질1 엄마가 야근하는 날이면 그나마 아빠가 일찍 들어가잖아. 네 숙제를 챙겼으면 좋겠다는 엄마 부탁 때문에 전화를 했어. "오늘 엄마 늦게 들어오는 거 알지? 아빠도 늦게 도착할 건데 할머니 집에서 미리 숙제를 했으면 좋겠네. 집에 가면 너무 늦잖아. 숙제 먼저 하고 TV 보면서 기다렸으면 좋겠다. 숙제 미리 하면 집에서는 그냥 씻고 놀면 되잖아. 그렇게 하자. 어때 딸?""아빠, 그런데 나 연필이 없어." 그래, 늘 중요한 건 따로 있더라. 미안.
측은지심 엄마와 시장에서 고등어를 사면서 생선 손질하는 모습을 라이브로 처음 봤다며. 할아버지가 선장이어서 어렸을 때 보릿고개(?)를 회로 넘겼던 아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에게는 꽤 충격이었겠더라. 엄마가 고등어 구이를 반찬으로 내놓았더니 움찔하던 네가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더구나. 고등어가 불쌍하다고. 당황한 엄마는 원래 동물은 서로 먹고 먹히는 것이라는 설명부터 시작해, 맛있는 음식이 된 고등어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윤회·환생론까지 끌어들였다네. 아빠가 듣기에는 별 설득력이 없던데. 여튼, 겨우 고등어 한 젓가락을 맛본 너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평을 남겼더구나. "그래도 맛은 있네. 고등어는 꼭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엉엉." 고등어는 불쌍하고 구이는 맛있고, 어렵지? 사는 게 늘 어렵단다.
막대사탕 막대 사탕을 입에 물던 네가 '담배'라고 했을 때 깜짝 놀랐어. 일단 엄마가 부엌에 있어서 매우 다행이었단다. 낮은 목소리로 너에게 초강력(?) 위험 신호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지. "예지, 아빠는 괜찮지만 엄마는 진짜 싫어하거든. 엄청 화낼 수도 있어. 앞으로 그런 말 하지마.""그런가? 알았어." 물론 엄마가 네 담배 코스프레(?)를 근거로 아빠를 몰아붙일 때 드라마 핑계를 댈 생각이다만, 설득력은 없을 것이야.
잠꼬대 TV를 보는데 일찌감치 자던 네가 갑자기 배시시 웃더구나. TV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나 싶어 일단 껐어. 짧게 킥킥거리던 너는 뭔가 아쉬운 듯 애교도 부리더니 다시 무표정하게 곯아떨어지더구나. "아빠, 잠꼬대 해?""아빠? 자고 있으니 내가 잠꼬대 하는지는 모르지.""그러면 나는 잠꼬대 해?" 그 질문에 갑자기 생각났단다.
산수 네가 '한'과 '원'이라는 글자를 놓고 결국 같은 글자라고 했을 때 뭔 말인가 했단다. '우'를 뒤집으면 'ㅎ'이 되고, 'ㅓ'를 뒤집으면 'ㅏ'가 되니 '원'이 '한'이 되는 거 아니냐고 했을 때 그저 감탄했지. "엄마! 236 다음에 뭐야?""응, 237!" 그래, 다 잘 할 필요 없단다. 산수 따위야 뭐!
굽자! 주말 점심 때가 다가오자 혹시 외식할 거냐고 물었지? 좀처럼 먹는 것으로 욕구를 드러내지 않는 네가 먼저 말을 꺼내 반가우면서도 궁금했다. "전에 엄마랑 갔던 고기 구워 먹는 집 있잖아. 식탁 가운데에 불 집어넣고 백김치 반찬 나오고 약간 양념 맛도 나는 고기 구웠고. 그런데, 만약 안 되면 다른 데 가도 괜찮아." 그렇게 디테일하게 설명하는데 선택권이 어딨냐? 아가, 굽자!
나쁜 새끼! 학교에서 어떤 남자애가 때렸다면서. 맞은 것처럼 아빠를 때려보라 했더니 뺨을 찰싹 쳤잖아. 아프지는 않았는데 충격 받았단다.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응징했다니 잘했다.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서는 안 되거든. 야근하고 들어온 엄마에게 그 말을 전했더니 조심스레 네 기분을 확인하고 조곤조곤 조언하더구나. 너도 잘 알다시피 아빠야 막말을 즐긴다만, 엄마는 단어 선택이 무척 신중하잖아. 하지만 말이다. 네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네 엄마는 갑자기 눈에 힘을 확 주면서 말하더구나 "이노무 새끼가 누구를!" 물론 '내가 이런 말 진짜 잘 안 한다'는 단서를 달더라만 아빠는 순간 쫄았단다. 그노무 새끼 때문에.
벼락치기 혼자 방구석에서 몇 시간 동안 나오지 않길래 봤더니 방학숙제를 몰아서 하더구나. 방학 동안 그렇게 개기더니. 여튼, 엄마도 아빠도 숙제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벼락치기하는 게 어떤 면에서는 대견했다. 그나저나 저렇게 한 번 성공(?)하면 습관이 되지 않겠느냐는 걱정에 네 엄마가 그러더구나. "방학 내내 숙제 준비한 애들과 비교하면 완전 차이가 많이 날 걸. 성격상 충격을 좀 받을 것이고, 다음에는 벼락치기 못 할 거야." 한마디로 당해보라는 거지. 아빠도 엄마 생각에 동의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