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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5년 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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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아빠, 저 요즘 동영상하고 TV 많이 안 봐요." 밥 먹다가 느닷없이 그 얘기를 하길래 조금 당황했어. 물론 네가 유튜브 영상과 TV를 오래 볼 때면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또 보고 싶은 걸 억지로 막을 수는 없잖아. 사람은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도록 생겨먹었거든. 그래서 '보지 마라', '그만 봐라' 대신 아빠가 선택한 말이 '10분만 더 봐라', '이 프로만 더 보자'였거든. 여튼, 너는 생각보다 절제라는 게 되는 아이구나. 많이 기특했다. 그리고 네 선택이 분명히 칭찬을 받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아빠에게 툭 던지듯 얘기하는 감각도 훌륭했단다.
no. 200 6살 딸에게 쓰기 시작한 편지가 200편을 채웠다. 딸은 지금 9살이고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예전에 누가 '육아일기(育兒日記)' 잘 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육아에 그다지 이바지한 바 없는 아빠로서 굳이 이름 붙이면 '견아일기(見兒日記)' 정도가 맞겠다고 했다. 그냥 보이는 대로 옮긴 것이니 그 정도 이름이 적절하다. '진짜 자애롭고 꼼꼼하냐'는 질문도 받았는데, 이 질문이 내 처지에서 우스운 게 '반어법'으로 썼기 때문이다. 에 나오는 '자애롭고 꼼꼼한 가카'와 같은 용법이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이전에 나는 자애롭지도 꼼꼼하지도 않은 그냥 아빠였다. 딸은 사랑스럽게 자라고 있다. 너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이 편지를 사랑스러운 딸에게 보내는 애정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조금 곤란하다. 언..
용기 "아빠, 내가 용기가 없어요?" 깜짝이야. 네가 생각하는 용기라는 게 갑자기 궁금해졌단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용기? 괴롭히는 친구에게 야무지게 맞서는 용기? 어두운 곳을 혼자 걸을 수 있는 용기? 무서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는 용기?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용기인지 모르겠어요." "진짜 용기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거거든. 엄마, 아빠가 서로 잘못한 거 없다고 싸우는 거 봤지? 예지는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잖아. 그래서 예지가 엄마, 아빠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거든." 배시시 웃는 모습이 예쁘더구나. 항상 용기 있는 사람이 되거라.
알까기 학교에서 친구와 알까기를 했다면서. 자꾸 너에게 지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하겠다며 게임을 끝냈다고? 그래도 친구 마음 이해하지? 친구도 속상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졸지에 게임을 계속할 수 없는 너도 속상했을 것이고. "섭섭했지만 둘 다 화를 내지는 않았어. 친구는 다른 친구와 알까기를 하고 나는 심판을 봤어." 아주 좋은 해결책을 찾아냈더구나. 어른들이 참 못하는 정치라는 게 별 거 아니란다. 핵심은 이해와 타협이지. 그나저나 지난해 아빠가 사내 알까기 대회에서 우승한 얘기 했나?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가 보다.
번식 물고기 밥을 주던 네가 어항을 한참 쳐다보더구나. "아빠, 물고기가 또 새끼를 낳았어요." "그래? 예지가 밥을 잘 챙겨 줘서 그런갑네." "밥 잘 먹는다고 새끼를 낳나요." 심드렁한 네 표정 탓에 더 부끄럽더구나. 그러게 왜 그렇게 멍청한 답을 했을까.
효녀 "아빠, 지갑에 얼마 있어?" "지갑에? 3만 2000원." "그래? 난 14만 5000원 있는데. 지폐만." 화들짝 놀라서 돌아봤더니 저금통을 깠더구나. "아빠가 예지한테 용돈을 받아 써야겠네." "그래, 아빠 써." 그래, 효녀구나.
크로스 체킹? "아빠는 결혼하고 나서 엄마랑 헤어지고 싶은 적 없었어?" 느닷없는 질문에 적잖이 놀랐다. "엄마가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얘기할 때 헤어지고 싶었어.""어? 엄마도 아빠랑 싸울 때 그랬다던데 똑같네.""뭐? 엄마도? 그럴 리가 없는데, 엄마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을 텐데.""아냐. 아빠도 엄마한테 무섭게 얘기할 때 있잖아." 그렇게 양쪽에 물어서 확인하는 것을 아빠 회사에서는 '크로스 체킹'이라고 한단다. 기특하구나.
개그 욕심 너를 웃기는 게 아빠에게 작은 낙이다. 개그 하나 던졌는데 표정에 변화가 없더구나. 웃지 않아서 섭섭하다고 했지. "아빠! 으이그." 손가락 끝으로 아빠 코를 꾸욱 누르면서 웃더구나.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으이그'에서 엄마 말투가 느껴져 조금 놀랐어. 혹시 코를 누른 게 귀엽다는 뜻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