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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5년 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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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력1 구석에서 혼자 웅얼웅얼 하길래 뭐하나 했어. 헤드셋을 쓰고 동영상을 보며 따라하는 게 노래 같기는 했는데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더구나. 남자키와 여자키를 변화무쌍하게 오가고 아낌없이 가성을 쓰는 것을 봐서 뭔가 상당히 고난도라는 것을 짐작했단다. "다 돌려놔~" 그래, 그 노래였더구나. 여튼, 행동과 말투가 늘 차분한 너에게 처음으로 어떤 불안함을 느꼈단다. 다 잘할 필요는 없다만.
빨래 엄마와 빨래를 널 때마다 너를 부르는 이유가 있다. 서로 도우면서 가족애를 느끼고 네 성장을 확인하며 이제 스스로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한 명으로서 제역할을 해내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는 개뿔! 혼자 하려니 귀찮아서지. 그나마 네가 이제 충분한 전력으로 자랐기에 일이 훨씬 수월하단다. 그래서 또 불러낸 것이고. "아빠, 빨래 널 때마다 부르니까 이제 귀찮어.""귀찮은 게 분명한데 늘 도와줘서 고마워." 지체없는 답에 알겠다며 바구니에서 빨래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참한 일꾼 한 명 잃는가 해서 움찔했단다.
묵찌빠 슈퍼에 누가 다녀오느냐를 놓고 네 엄마와 잠시 신경전을 벌인 거 봤지? 이런 상황에서는 역시 '가위·바위·보'란다. 좀 색다르게 마주앉은 채로 종이에 각자 낼 묵찌빠 순서를 적기로 했지. 심판은 네가 맡았잖아. "예지, 엄마 뭐라고 적었어?""빠, 묵, 찌.""그러면 아빠는 뭐라고 적었지?""찌, 빠, 묵… 엥? 아빠, 엄마 거 보고 적은 거 아냐?" 아가, 됐고. 아빠가 엄마 맘을 훨씬 잘 헤아린단다. 그런 의미로 슈퍼도 다녀올 거고. 그나저나 3대 0이 뭐니 참.
빅엿 친구 집에 놀러갔다면서. 엄마는 당연히 친구 엄마에게 딸을 잘 부탁한다는 전화를 해야 했지. 친구 엄마가 집이 엉망이라 네가 놀랄 거라고 했다네. 네 엄마는 우리집도 항상 그렇다고 신경쓰지 말라 했다더구나. 그런데 네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친구 아빠에게 아주 빅엿을 먹였더구나. "아저씨, 집이 왜 이래요? 이거 참." 지난 주말에 청소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보라색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섹시하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었니? 아빠 안경테에 은은하게 깔린 보라색을 보면 알겠지만, 아빠가 보라색을 참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너는 막 웃어제끼더라. "아빠, 안 섹시해!" 너는 그렇다치고 네 엄마는 왜 같이 웃는지 모르겠다.
고자질 느닷없이 고자질이 나쁜 거냐고 묻길래 살짝 당황했다. 네 생각을 다시 물은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지. 너는 친구들이 고자질은 나쁘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더구나. 역시 이럴 때 정리하라고 아빠라는 게 존재한다. "예지가 잘못한 걸 아빠가 나중에 엄마에게 고자질하는 건 어때?""나빠.""도둑을 경찰에게 고자질하는 건?""안 나빠." 그 차이가 뭐냐고 물으면서도 그럴싸한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단다. 문제 자체가 워낙 고난도잖아. "아빠가 할 수 있으면 고자질할 필요 없잖아. 아빠 힘으로 안 되면 고자질 해야지. 그건 나쁜 게 아닌데." 오늘 상담 끝이다.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