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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5년 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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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 네 엄마가 소파에 널브러져 자는 너를 잠자리로 옮겨달라 하더구나. 예전에는 팔에만 힘을 줘도 가뿐했는데. 또래보다 작다지만 이제는 안기 전에 심호흡을 하지 않을 수 없구나. "바짝 안아서 천천히 들어. 허리 나갈라." 아빠를 향한 엄마 배려는 저 한마디로 쉽게 증명이 된단다.
대통령 물론 뉴스를 보는 아빠 표정이 좋지 않았고, 말끝에 토를 다는 거 역시 어른다운 모습은 아니었단다. "아빠, 아빠는 대통령을 싫어하잖아. 만약, 만약에 내가 대통령이 돼도 나를 싫어할 거야?" 그게 대통령이 싫은 게 아니다. 그리고 유난히 낯가림 심한 너에게 정치 쪽은 좀 그렇지 않니?
갑질 외할머니 방에서 TV를 보면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 했다며? 외할머니께서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더니 됐다며 다른 방에 있는 외삼촌을 굳이 불러서 물을 가져오라 했다고. 외할머니는 아프니까 말이다. 아빠와 띠동갑 어른이면서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그 작은 외삼촌에게. 호랑이는 하룻강아지 물 심부름을 씨익 웃으면서 했다네. 아빠는 아직도 네가 효심 가득한 손녀인지, 싸가지 없는 조카인지 결론을 낼 수 없구나.
발음 아이폰에 깔린 번역 앱을 가동해 한마디 해보라고 했지. '돨픈'이라고 하길래 뭔가 했단다. '돌고래'더구나. 아! 아빠가 정확하게 '돌핀'이라고 하자 'dark king'이라고 인식하며 '어두운 왕'이라고 뜨네. 무슨 혓바닥이 이 모양인지. 그래도 '애~뽀(사과)'와 '며억ㅋ(우유)'는 성공하는 거 봤지? "흐흐, 아빠 발음이 (인식)되는 게 더 신기해." 요즘 스파트폰이 꽤 똑똑하단다.
이해 외할머니집에서 며칠 지낸 너에게 또 외할머니집에서 자라고 하니 이유를 물었지. 예지가 미워서 그렇다고 하니 낄낄 웃더구나. 거참 자신감 하고는. 여튼, 갑자기 네가 아빠를 미워한 적이 없었는지 궁금했어. 서슴없이 그런 적 없다고 답하길래 오히려 당황스러웠단다. 섭섭하게 한 적도 있었고, 무섭게 야단친 적도 있잖아. "속상한 적은 있지만 미워한 적은 없어. 나를 야단친 것도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 아주 가식적인 모범답안이었다만 꽤 뭉클했단다.
긍정 하고 싶은 게 많다며 도서관 사서, 의사, 가수, 선생님 등을 읊더구나. 꿈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다만, 네가 자라서 뭐가 되든 항상 바탕이 돼야 할 깜냥에 대해서는 꼭 짚어주고 싶었어. "먼저 건강해야 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착한 마음, 그러니까 '착한 어린이' 할 때 착한 마음이 아니라, 잘 안 돼도 실망하지 않고, 뭐라 할까. 쉽게 지치지 않고 어쨌든 좋은 마음 같은 그…""아빠, 긍정적인 마음 얘기하는 거야?" 잘 알아듣는구나.
연휴 갑자기 벌써 목요일이라며 비명을 지른 것은 미안했다. 그래도 연휴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서. 쉬는 날이 그렇게 아깝냐고 물었지? 당연히 진짜 아깝단다. "예지, 너는 방학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지 않아?""아빠, 방학은 원래 짧어." 연휴보다 짧은 방학도 있냐? 자기 거 아까운 것은 아는구나.
배신 설 연휴 외할머니 집에서 야예 지낼 생각을 했는지 집에 엄마 혼자 보냈더구나. 불과 2주 전까지 자기 직전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찔찔 짜던 아이가 말이다. 엄마도 퍽 낯설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 다음날 아침에 필요한 게 없나 싶어 전화했더니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 했다고. 또 한방 먹였더구나. 배신감과 대견함이 어정쩡하게 섞인 엄마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덕분에 결혼 10년 차 아빠는 남는 건 남편밖에 없다는 말을 처음 들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