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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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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to 11살 이예지 양 에어컨을 틀어놓고 바지는 입지 않은 채 비옷 같은 가벼운 점퍼만 하나 걸쳤더구나. "예지, 에어컨 틀어놓고 점퍼를 입으면 어떡해?""얼굴하고 다리는 더운데 몸은 추워서요." 음… 설득될 뻔했잖아, 이 자식아!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파프리카 to 11살 이예지 양 오믈렛을 포크로 조금씩 떼어먹는 너에게 엄마는 오믈렛 사이 파프리카를 콕 찍어서 입으로 가져가며 이렇게 말하더구나. "엄마는 파프리카가 제일 맛있던데.""치~ 먹이려고 난리도 아니네.""아니, 진짠데." 아가, 엄마 말은 식성에서 우러나온 진심 맞다. 그래도 아주 통쾌했단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아이스바 to 11살 이예지 양 네 취향을 몰라 아이스바를 사면서 끌레도르와 메로나를 두 개씩 샀다. 당장 끌레도르를 먹길래 네 취향이 그쪽인가 보다 생각했다. 하루 지나 냉동실을 보니 메로나만 두 개 남았더구나. 메로나는 그냥 아빠가 처리해야겠다 싶었는데 뭔가 불안했는지 엄마가 그러더라. "여보, 예지가 메로나는 아껴 먹는 거라고 하더라고." 그래, 기어이 혼자 다 처먹어야겠다는 거냐?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생존수영 to 11살 이예지 양 오늘 생존수영을 배운다며. 생존하길 바란다. 문밖을 나서는 표정이 어쩌면 그리 밝고 걸음은 가벼운지. 아빠 머릿속에서 생존수영 수업이 기대된다는 네 말은 이렇게 번역되더구나. "학교 수업만 아니면 돼요!" 엄마는 초등학교에서 맨날 저런 수업만 하면 좋겠다더라. 아빠도 찬성이다. 최소한 초등학교만이라도 학교 가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수업만 하면 안 될까? 최소한 초등학교만이라도 말이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더위 to 11살 이예지 양 새벽에 울면서 침실로 들어왔다더구나. 너무 더워서 깼다며. 어쩐지 잠에서 깨니 방 기온이 툰드라더라. 너는 왜 방마다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의문이겠지만, 아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단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구를 위해서란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니까.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친구 to 11살 이예지 양 아쉬우면 너를 찾았다가 아쉬울 게 없으면 너를 험담하고 따돌리는 괘씸한 아이 얘기를 들었다. 너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더구나. 친구가 늘 아쉬운 너는 모질게 선을 긋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면서? 네가 엄마만큼 강하고 단호하면 좋겠다. "예지, 너 친구가 되고 싶어 장난감이 되고 싶어?""친구요.""필요할 때 찾고 필요없을 때 홀대하면 그게 친구야, 장난감이야?""장난감이요.""아빠는 예지가 누구에게나 좋은 친구가 되는 걸 바라지 누구 장난감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아." 잠깐 다부지게 바뀐 네 표정을 엄마가 봤는지 모르겠다.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 잘 대응하려무나. 너에게 만만찮을 그 고비를 넘기는 게 또 성장이란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발전 to 11살 이예지 양 자신 없는 수학 시험에서 92점을 받았다며? 그동안 노력이 보상받은 거니? 뿌듯해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지난 시험에서 84점 받았는데 이번에 92점 받았어요." 그래? 아빠는 네가 84점 받은 시험이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단다. 92점이 얼마나 대단한 점수인지 강조하려면 84점이 필요했겠지. 가치라는 게 늘 상대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듯해 흐뭇했다. 애썼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6신 to 11살 이예지 양 '6신을 바쳐 나라를 지킨 분들을 위한 날'. 6월 옆에 이렇게 적어뒀더구나. 읽고 한참 뭔 말인가 했다. 그러니까 'six body'가 되는 셈인데, 굳이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 알고 그랬겠지. 아니더라도 때 되면 알겠지 뭐.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