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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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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3 to 11살 이예지 양 친구들이 카드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고? 혼자 된 것 같아 슬펐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단다. "복수해. 다음에 예지도 친구가 끼워달라면 싫다고 하면 되겠네.""안 돼. 혼자인 것 같은 기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어." 아빠보다 낫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지구 지킴이 to 11살 이예지 양 "예지, 그만 먹어?""응, 배불러." 그러니까 어쩌면 그렇게 애매하게 남길 수 있나 말이다. 밥 두 숟갈 반이 참 그렇다. 아빠 한끼로는 부족하고 그대로 설거지통에 넣을 수는 없고. 요기조기 뜯긴 생선과 께적거린 반찬, 밥 두 숟갈 반을 처리하고자 아빠는 밥그릇에 물을 붓는다. 기억해라. 네가 동물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아이일지는 몰라도 지구는 아빠가 지킨다는 거.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실패 to 11살 이예지 양 우리처럼 스테이크, 랍스타, 캐비어, 송로버섯 뭐 어쨌든 이런 게 일상인 가족에게 라면을 먹는 것은 아주 소중한 시간이란다. 여튼, 젓가락질이 어려울 정도로 불은 면이 아쉬웠던 아빠는 총구를 네 엄마에게 겨냥하고 시선은 너에게 둔 채 이렇게 말했지. "라면은 역시 아빠가 더 잘 끓이는 거 같어. 면이 너무 불었네. 안 그래?""응, 맞기는 맞는데 라면 내가 끓였는데. 엄마가 물만 끓여주고 내가 다 끊인 건데. 이상해?" 괜히 틈새시장을 파고들려다 고객 심기를 아주 제대로 긁었구나. 시장 조사가 부족했고, 아빠가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대통령 to 11살 이예지 양 "아빠, 대통령을 잘 뽑은 거 같아요." 엄마와 뉴스를 보는데 네가 그렇게 말해 깜짝 놀랐단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하니 간단하더구나. 얼마 전만 해도 뉴스 보면서 욕하고 한숨 쉬고 머리 뜯고 하다가 요 며칠 좋네, 잘했네, 다행이네 이러고 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네가 세상과 접촉하는 통로로서 부모 역할을 잠시 생각했단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허세 to 11살 이예지 양 때맞춰 라면을 끓이는 아빠에게 홀려 어느새 뒤에서 멤돌더구나. 그냥 끓이면 될 것을 냄비를 기울여 긴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젓고 들었다 놓으며 재주를 부렸단다. 여자는 비주얼에 약하다면서? "아빠, 많은 요리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그렇지 않을까? 아무래도.""그렇겠네요." 아무 내용도 없는 이 대화 뜻을 다른 사람은 잘 모를 거다. 아빠 귀에는 이렇게 들렸단다. "우왕! 라면이다. 다 되가요? 빨리 먹고싶다!" 큰 그릇에 면을 먼저 옮기고 달걀을 풀어 면과 잘 비비고 나서 그 위에 끓고 있는 국물을 부어 달걀이 실처럼 익으면서 풀어져 올라오게 하는 것은 너를 위한 퍼포먼스란다. 아빠 먹을 때는 그렇게 안 먹거든. 눈에서 별이 반짝반짝하더구나. 또 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심 to 11살 이예지 양 엄마가 외할머니 집에 가자고 제안했더니 이렇게 되물었다더구나. "왜? 밥하기 싫어?" 꽤 날카로운 질문에 감탄했다. 나이스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
개과천선 to 11살 이예지 양 "아빠는 왜 차에서 욕을 해?"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서 엄마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웃더라. 일단 최근 몇차례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례를 CSI처럼 검증하며 스스로 변호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욕이 나온다는 논리였지. 너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알겠고, 그래도 욕은 안 했으면 좋겠어." 그래, 그러자꾸나. 아빠는 이거 하나는 잘 안다. 당장 정권이 바뀌더라도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거. 자신을 스스로 아주 쬐끔 바꾼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세상 바뀌는 게 그렇게 쉬울 리 없잖아. 그래도 오늘 봤니? 고속도로에서 깜박이도 넣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차를 향해 아빠가 이렇게 말했잖아. "깜.짝.이...
투표 to 11살 이예지 양 "엄마랑 아빠는 이번에 대통령 누구 찍어?" 궁금했니? 그래도 가르쳐 주지 않기로 했다. 보통, 자유, 비밀, 평등 뭐 이런 선거 원칙 따위 문제가 아니란다. 돌이켜보면 아빠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어른들이 무심코 뱉는 정치(인) 평이 고스란히 아이들 정치 포지션으로 고정됐던 것 같아서 말이다. 정치적 성향, 지지하는 정치인은 네가 차차 정하려무나. 신중하게. "아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홍준표는 안 돼.""왜?""무상급식 없앴다던데." 그래, 그런 식으로 네가 판단하면 되는 거다. from 자애롭고 꼼꼼한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