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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통화 태풍이 몰아치던 날 아빠는 출장 중이었다. 집이 걱정돼 전화했더니 네가 받더구나. 엄마가 바꿔 준 적은 있어도 네가 바로 전화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예지가 전화 받았어?" "응." "엄마는?" "화장실 갔어." "안 무서워?" "응." "용감하네, 창문 안 흔들려?" "조금 흔들려." "안 무서워?" "응" "바람 많이 안 불어?" "바람 조금 불어." "안 무서워?" "응. 아빠, 그런데 왜 물어본 거 자꾸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왜 자꾸 같은 질문을 했을까.
인류애 "아프리카 새깜둥이 마마똥꾸 고릴라 돼지고기 삼겹살" 네가 신나서 흥얼거리는 말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아프리카 새깜둥이'라는 표현은 계속 마음에 걸리더구나. 괜히 검은 피부를 놀리는 것처럼 들렸거든. 피부 색은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아프리카 친구를 놀리는 것처럼 들려서 좋지 않다고 했고, 네가 선뜻 동의해서 흐뭇했다. 며칠 뒤 뭐가 신났는지 '아프리카 새깜'까지 하다가 얼른 입을 막더구나. 아빠 말을 기억해서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한 번에 들었던 기억이 별로 없었네.
언감생심 아빠를 우주만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순간 자신감마저 우주만큼 치솟더구나. 그게 지나쳐 그동안 넘보지 못했던 아성을 한 번 깨려 했던 게 실수였나 보다. "우주만큼? 그러면 엄마는?" "엄마요? 엄마는 우주보다 더 사랑해요." '우주보다 더'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게 바로 아빠와 엄마 차이였구나. 박명수와 유재석 차이고 2인자가 1인자를 함부로 넘보면 안 되는 이유지. 실망했다만 좋은 것 하나를 배웠단다.
홍보 거실에서 뒹굴거리던 네가 무슨 바람인지 널브러진 인형을 정리하기 시작하더구나. 깔끔해진 거실을 보면서 칭찬을 아낄 수 없었다. 너도 상당히 뿌듯해 하더라. 하지만, 뭐가 아쉬운지 주변에서 계속 서성이는 이유를 알아채기는 어려웠어. "아빠, 내가 정리한 거 사진 찍어서 엄마한테 문자로 보내줘도 괜찮은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기는커녕 오른쪽 새끼발가락까지 알게 하는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단다.
체크 너에게 아빠가 5순위 정도 될까?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다음에 아빠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침에 아빠가 안 보이면 체크하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는 개구쟁이지만 엄마 옆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이 말을 전해듣고 한참 웃었다. 개구쟁이? 그래, 장난꾸러기도 괜찮고 심술쟁이도 괜찮다. 옆에 계속 있으면 좋겠다는 말에는 계속 흐뭇하더구나.
소외 네가 엄마에게 푹 안길 때만 해도 미처 '사랑 배틀'이 길게 이어질 줄 몰랐다. "엄마 사랑해.""엄마도 예지 너무 사랑해.""나도 엄마 너무 너무 사랑해.""엄마도 예지 너무 너무 너무 사랑해.""나도 엄마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사랑해.""엄마도 예지 너무 너무 너무 너무무무무 사랑해." 이 행복한 장면에 끼고 싶은 게 큰 욕심은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아무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이겠지. "아빠도 예지 사랑해.""나도 알아." 이 반응이 섭섭하지 않다면 그 또한 거짓이겠지.
명연기2 엄마가 밥 먹자는데 아이패드 하겠다는 네가 살짝 괘씸했단다. 아이패드도 중요하지만 밥 먹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빠로서 당연했지. 순순히 자리에 앉은 너는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빈 그릇을 내밀더구나. 혀 짧은 소리로 다 먹었다면서 말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칭찬 아니겠니. '흠칫 놀라며' 같은 지문을 소화하는 것은 오롯이 아빠 몫이다. (흠칫 놀라며)"진짜 대단하네. 7살 언니 같네." 아빠 배역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명연기 외할머니 집에서 자는 너를 안고 집으로 가는데 그날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단다. 너를 껴안고, 우산 들고, 아빠 가방 들고, 네 가방도 들었지.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너에게 괜찮냐고 물었던 것은 궁금하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걸었으면 하는 바람도 섞였어. 엘리베이터 거울에 아빠 어깨 너머 말똥말똥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가 보이더구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걷지 않겠느냐고 물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더라. 다시 거울을 보니 너는 미간에 약간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을 질끈 감았더구나. 결국, 침대까지 안고 가서 눕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