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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5년 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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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1부터 100까지 사이에 숫자 하나를 생각해보라 했잖아. 그래, 한 번 맞춰 보겠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72!""어! 어떻게 맞췄어?" 너도 흠칫 놀라더라. 곧 표정관리를 마치더니 설명하고 싶었나 보구나. "어떻게 맞췄는지 알아?""아니, 신기하네.""그냥 느낌이 왔거든." 활짝 웃는 모습이 좋더라. 아빠는 네가 72를 외칠 때 느낌이 왔다.
센스 네가 전화로 퀴즈를 하나 내겠다고 했을 때 무슨 수작(?)인가 했다. 그러고 보니 전화 퀴즈는 처음이구나. "아빠, 들깨를 먹으면 잠이 일찍 깨, 안 깨?""덜깨!" 깔깔 웃으며 '딩동댕'을 외치는 목소리가 참 반가웠다. 그나저나 네 엄마는 같은 문제를 냈더니 들깨와 자는 건 별로 상관 없는 것 같다 했다고? 숨이 턱 막히더라. 오죽하면 아빠를 찾았겠니. 좀 더 크면 아빠도 답답·갑갑했던 거 얘기해줄게.
칼로 물 베기 "아빠, 칼로 물 베기가 무슨 뜻이야?" 다른 아빠들은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다만 아빠 방식은 이렇단다. 물을 담은 그릇을 놓고 과도를 넣어서 이리 저리 휘저었잖아. 기합까지 넣으면서. "아빠 뭐해?""칼로 물 베잖아.""쓸데 없는 짓이구나." 그래, 정확하게 이해했구나.
상대성이론 그러니까 네가 무거워지고 달려오는 속도가 빠를수록 그걸 받아내야 하는 사람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공식으로 쓰면 E = mc^2이다. 현재 상황을 보면 네가 달려오는 힘(E)을 봤을 때 외할머니는 중상, 엄마는 타박상, 그래도 아빠 정도가 겨우 받아낼 듯하다. "아빠~." 멀리서 팔을 벌리고 후다닥 달려오는 너를 보며... 흡!
놀자 숙제를 하던 너는 한손으로 뽀로로 인형을 흔들며 노래를 흥얼거리더구나. 그래 노는 게 제일 좋지. "숙제는 1초 만에 끝내고 100시간 놀았으면 좋겠어." 하루가 24시간인데. 그래, 네 마음을 왜 모르겠냐. 하지만, 네가 맛있게 먹는 어묵도 두 끼 연속 먹으면 질리듯, 노는 것도 중간에 쬐끔, 아주 쬐끔 공부가 섞여야 훨씬 재밌을 것이라는 진리를 전하는 게 아빠 역할이다. "맞아. 숙제하고 놀면 훨씬 재밌기는 하지." 네가 숙제를 하든 말든 말길 잘 알아먹어서 좋다. 그거 안 되는 어른도 많거든.
해답 짓궂은 짝지 때문에 힘들어 하던 너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모든 지나친 행동에는 이유가 있으며 관찰과 추리로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엄마에게 들으니 짝지 문제가 해결됐다고? "짝지를 잘 관찰했어? 어땠어? 이제 이해가 좀 돼?""아니, 짝지가 바뀌었어. 너무 떠든다고 한 줄 뒤로 갔거든." 그렇게 느닷없이 해답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게 삶이다. 새 짝지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배틀 -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 어디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아침부터 식탁에 앉자 마자 동요 배틀이 들어오더구나. 아빠가 또 승부를 피하지는 않잖아. 지체없이 받아쳤지. - 딸 딸 무슨 딸 쟁반같이 둥근 딸 / 어디어디 떴나 식탁 위에 떴지. 너도 엄마 닮아서 지는 거는 싫어하더구나. 바로 다음 배틀로 들어오네. 그래야 재밌지. 진짜 승부다! - 밥 밥 무슨 밥!(아빠는 그 정도에 당황하지 않아)- 냄비 위에 볶은 밥! / 어디 어디 떴나?(솔직히 수비하기 어렵지 않나?)- 숟갈 위에 떴지. 나이스!
짝지 전학한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든데 버거운 짝을 만났나 보구나. 너를 괴롭히고 놀리다니 마음이 아팠다. 오늘 울었다면서? 앞으로 너를 힘들게 하는 친구가 있으면 속상해 하지 말고 자세히 관찰하고 추리해 봐. 뭐든 지나치면 이유가 있거든. 지나치게 말이 많거나 필요 이상으로 장난을 거는 것은 대부분 외로움 때문이란다. 관심이 필요하다는 거야. 네 실수를 빌미로 놀렸다고? 그것은 자기가 얼마나 강한지, 잘하는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지. 나약하고 자신감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 실수를 자기가 잘난 근거로 삼는 법이거든. 어른도 마찬가지다. 너는 어떠니? 강한 아이니? 강한 아이는 약한 아이가 괴롭힌다고 우는 거 아니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