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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5년 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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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 네가 돼지국밥을 잘 먹는 것은 참 신기하다. 우리가 가는 국밥집에는 직접 담근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 셀프로 마실 수 있도록 하잖아. 종이컵 한 잔은 공짜고 추가는 한 잔에 1000원이지. "아빠 거 한 잔, 엄마 거 한 잔" 술을 안 마시는 엄마는 아빠 수작(?)에 키득거렸다. "예지도 한 잔?""아빠, 나 술 못 마시잖아.""그러면 아빠가 대신 마셔줘야지.""으흐흐. 아빠 꼼수!" 그래, 오늘은 두 잔이다. 그나저나 '꼼수'라는 말은 언제 배웠니? 용도가 아주 정확했다.
플레이팅 기본은 넓은 접시에 음식을 조금만 담는 것이더구나. 건더기를 먼저 올리고 소스를 숟가락으로 조금 흘렸지. 플레이팅이라나 뭐라나. "아빠, 떡볶이 달콤·새콤 진짜 맛있어요." 네 '엄지 척'에 자신감이 차올랐단다. TV 쉐프 따위 비켜!
성동격서 네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엄마, 아빠가 없어. 너무 불안해서 일단 전화를 했는데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아. 그러면 네 기분이 어떨까? "아빠, 너무 무섭고 섭섭할 것 같아.""그러면 네가 학교 마칠 시간도 지났고 집에는 없고 전화도 받지 않았을 때 엄마 기분은 어땠을까?""음, 엄마한테 사과할게." 그래, 말길 잘 알아먹어 대견하다. 하지만, 상처받지 말라고 이리 둘러치고 저리 둘러치는 아빠 기술이야말로.
감기 기운 감기 기운이 있어 학원을 쉬기로 했다면서? 그동안 피곤하다는 이유보다 신선해서 좋았다. 너도 알다시피 엄마·아빠 모두 학원은 물론 학교도 출첵을 강요하지는는 않거든. 엄마가 집에 들어가니 소녀시대 노래에 맞춰 방송댄스 연습을 하고 있었다더구나. 물론 아빠는 잘 알아. 네가 학원에 갔다면 반드시 감기에 걸렸을 거야.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여행 여행, 맛있는 음식 먹기, 집에서 책·TV 보기 중에 뭐가 좋니? 여행? 이유를 물었더니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게 좋다고. 차로 이동하는 시간은? "창밖에 지나가는 풍경을 계속 보면 지겹지 않아요." "그래? 너 차에서 주로 스마트폰 보잖아." "아빠, 으흐흐흐흐흐흐."
시험 70점을 받은 수학 시험지를 보고 엄마가 걱정이 많더구나. 아빠야 뭐 수많은 네 강점 가운데 몇 안 되는 약점을 인간적으로 본다. "예지, 시험 많이 틀렸던데 속상하지 않았어?" "아니, 괜찮았어. 다음에 75점 받으면 되지. 그 다음에 80점 받고." 당당한 표정에서 엄마가 보이더라.
두부 "엄마! 두부가 영어로 뭐야?" 느닷없는 영어 퀴즈에 엄마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답하더라. "투~부." 너와 함께 정말 실컷 뒹굴거리며 웃었잖아. 그런데, 진짜 두부가 영어로 뭐냐? 엄마 말이 맞는 거 아냐?
엄마 노릇 "하늘이가 응가했어." "하늘이가 잠투정해." "하늘이가 자꾸 달라붙어." "하늘이가 다리 위에서 자." "하늘이가 할퀴었어." "하늘이가 깨물고 핥아." 고양이가 하는 그거 최소 6년 정도 네가 엄마에게 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