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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5년 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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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웬만해서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 아빠가 봄에 한 약속을 지금까지 미뤘던 것은 그냥 싫었기 때문이란다. 엄마·아빠 삶에 고양이는 없었거든. 그나마 생기기는 착하게 생겼다만. 하나뿐인 동생 잘 돌봐주기 바란다. 잠투정하는 거 보면 너 아기 때 생각도 나네. 네가 지은 '하늘이'라는 이름도 괜찮더라.
예상 밖 양손으로 엄마 볼을 잡고 좌우로 흔들며 도리도리 하길래 아빠가 그랬지. "내 아내 갖고 놀지 마!" "그래? 그럼 아빠." 너는 아빠 볼을 잡고 좌우로 흔들더구나. 정말 예상 밖이었다.
개학 갑자기 보고서를 언제 쓰면 되느냐는 밑도끝도 없는 질문에 당황했다. 준비됐을 때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고만고만한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방학이 끝나는데 걱정이에요." "(아! 방학숙제) 보고서 쓰는데 뭐가 필요해?" "연필하고 종이요. 흐흐." 오호, 해보자는 거냐? 네가 먼저 시작했다.
적반하장 쌀과자를 세 개째 먹는 아빠를 빤히 보던 너는 엄마에게 아빠가 너무 빨리 먹는 거 같다고 찌르더구나. 감히 네 개째는 못 뜯겠더라. 그렇게 간접적으로 메치는 기술은 어디서 배웠니? 쌀과자 두 개째를 뜯는 너를 보고 아빠도 엄마에게 꼰찔렀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 네가 웃겼다. "치,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란다더니." 오늘부터 당분간 독서금지다. 멍멍!
본질2 엄마가 만든 샌드위치를 먹으며 만족하더구나. 환하게 웃으며 최고를 외치자 네 엄마는 새침떼기 같은 표정으로 잘난 척하더구나. 그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던 네가 아빠에게도 동의를 구했지. "엄마 진짜 음식 잘 만들지." "그럼, 이렇게 음식 잘 만드는 엄마를 누가 골랐지?" "아빠?" 그래, 어떤 복잡한 상황에서도 본질을 놓치지 말자.
아빠 쉐프 밥은 깨작깨작 먹으면서 라면은 마시는 듯하는구나. "아빠 라면은 맛있고요. 맵지도 않고요. 특히 면이 쫄깃쫄깃해요." 너에게 만들어주는 라면 이름이 '너를 위해서라면'이란다. 네 맞춤형 레시피지. 그런 평가 매우 당연하다. 하지만, 그 정교한 평가가 다음 라면을 위한 것이 분명하기에 감동할 수 없더구나. 네 칭찬은 실패다.
주고받고 제목도 어려운 무슨 무슨 무슨 책을 세 권이나 읽었다기에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예쁘고 똑똑하네.""글쎄, 유전자 탓인가?" 네가 기브 앤 테이크를 아는 것 같아 흐뭇했다.
신고 길에서 주운 머리고무줄을 아파트 경비실에 맡기며 주인 찾아 달라고 했다면서. 경비실 아저씨가 "너는 필요하지 않니"라고 물은 이유를 아빠는 너무나 잘 알겠더라. "저는 집에 머리고무줄 많이 있어요." 아저씨가 주인 꼭 찾아주겠다고 했다고. 무더운 요즘 일도 힘들 텐데 동심을 파괴하지 않은 아저씨께 고맙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