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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015년 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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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갑자기 고양이를 안고 아빠 앞에 앉아서 곡(?)을 하길래 깜짝 놀랐다. 그것도 시선은 다른 곳에 두고 말이다. "아이고 하늘아. 누나는 널 키우고 싶은데 아빠가 너 때문에 아프다네. 엄마는 아무 대책도 없고. 아이고 어쩌냐. 누나는 네가 좋은데." 이 무슨! 아빠가 고양이 털 알레르기 진단을 받았고 엄마가 고민하는 것도 사실이야. 그런데 이런 시위(?)를 할 줄이야. "예지, 서로 조심하면 돼. 아빠 괜찮아." 힐끔 아빠를 보던 너는 쪼로록 하늘이와 방에 들어가더니 깔깔거리며 놀더구나. 갑자기 요즘 집회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물론 지금 필요한 건 너 같은 집회보다 아빠 같은 지도자지. 훗.
의사 표현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는 너에게 아빠가 달라붙으니 두손으로 얼굴을 밀어내며 쏘아붙이더구나. "아빠, 귀찮아! 하지마!""예지가 귀찮아 해서 섭섭해.""섭섭해도 귀찮아. 안 했으면 좋겠어." 또박또박한 반박에 더는 할말이 없었다. 여전히 섭섭했고. 하지만, 아무리 섭섭해도 싫다고 분명하게 말한 것은 아주 잘했지 뭐. 그나저나 아까 상황은 TV 때문이겠지?
색깔? 핫핑크 같은 강한 색이 싫다고 했다면서. 연분홍이나 하늘색 같은 파스텔톤 색이 마음에 든다 했다고. 그래, 원색은 보통 성격 좀 있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런 면에게 네가 배려심이 있는 것 같기는 해. "엄마, 그런데 하필 휴대폰 담는 가방이 핫핑크야." 그러니까 말이다. 그냥 휴대폰 담는 가방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면 간단하지 않니? 배려는 무슨.
산타 "아빠가 전에 산타 할아버지가 쓴 거라며 편지 준 거 기억나? 영어로 '하이, 아임 산타'라고 썼잖아. 내 펜으로." 낄낄거리는 네 앞에서 끝까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우긴 것은 당황해서 그랬어. 느닷없이 그렇게 들이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단다. 하지만, 아빠는 산타가 있다고 믿어. 그것도 아주 많이. 빨간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배불뚝이 할배를 기다리지 않는 순간부터 사람은 스스로 산타가 될 수 있거든. 네가 앞으로 사람과 세상과 나눌 선물을 기대한다. 물론 아빠부터 챙기고.
책임 아침마다 고양이 똥 치우는 일을 너에게 시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최소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도 돌보지 않겠다면 그냥 움직이는 인형이나 갖고놀아야지. 더군다나 네가 원해서 맞은 식구잖아. "나 키울 때도 힘들었어?""너? 하늘이 열 배는 힘들었어!""으흐흐 그랬겠다." 그나저나 병원에서 아빠가 고양이 털 알레르기 있다네. 그렇다고 저 말썽꾸러기를 내치지도 못하겠고.
싸움 엘리베이터 앞에서 너는 갑자기 아빠에게 혀를 쭉 내밀며 '메롱, 메롱' 그러더구나. 그 과감한 시도를 하면서 아빠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했니? 최소한 이런 반응은 아니었을 것이야. "안 약오르지롱~." 순간 당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더구나. 모든 싸움은 상대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한단다. 후훗.
인정 "아빠, 저 사실 옛날에는 아빠가 엄마보다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커서 무서웠는데요. 이제는 아빠가 아빠 같아요." 엄마가 주말근무로 회사에 있는 동안 아빠가 꽃 구경을 시켜주기는 했지. 길에서 파는 회오리 감자와 솜사탕, 휴게소에서 파는 또띠아와 오징어 조미 튀김까지. 네 맘에 들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겠더구나. 그나저나 9년 만에 '아빠가 아빠 같다'는 고백(?)이라니.
행복 지수 TV에서 이런 것을 봤어. '불행하다'를 0점, '행복하다'를 10점으로 표시한 수직선에 너는 몇점이냐고 한 초등학생에게 물으니 2점에 표시하더구나. 아빠가 얼마나 놀랐겠니. 당장 너를 불러 같은 수직선을 내밀었지. 잠깐 고민하던 너는 씨익 웃더니 7점에다 표시했다. 일단 한숨 돌렸고 어디서 3점이 빠졌는지 궁금했다. "내가 실수했을 때 놀린 친구가 있었고(나쁜 새끼!), 숙제가 많을 때(선생님! 그럴 수도 있죠 뭐)" 어쨌든 엄마·아빠 모두 불행 요소가 아니어서 한숨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