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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절제는 고양이라면 타고난 소양이야. 우리는 그릇에 밥을 많이 담아둔다고 배터지도록 처먹지 않아. 적당히 허기를 채우면 식사를 그칠 줄 알지. 인간은 가진 것은 하찮게 여기고 갖지 못한 것에는 집착하는 것 같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또 환장하지. 아빠 양반이 모니터를 보면서 비싼 차를 뒤적거리는 거 보면 참 한심해. 그나저나 아빠 양반, 여기 공 좀 꺼내 봐. 이게 왜 가질 수 없게 돼 있나. 성질 나게. 야옹.
색깔 "아빠는 무슨 색깔이 좋아?" 짙은 파란색이라고 답하려다 한 번 더 고민했다. 미술을 좋아하는 네가 색 취향을 물었는데 빨주노초파남보 중에 하나를 답할 수는 없잖아. 어쩐지 없어 보일 수 있겠다는 감이 스쳤단다. 뭔가 양념이 필요했지. "혹시 인디고 블루 알아? 아빠는 그 색이 좋던데.""오! 나도 좋아하는 색인데. 아빠, 코발트 블루도 좋아하겠네." 일단 살짝 감탄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런데 코발트 블루는 뭐냐?
욕설 한심한 인간들이 그나마 상식은 있구나 싶을 때가 욕 앞에 멍멍이를 붙일 때지. 품위, 교양, 자태 뭘 따져도 고양이는 욕과 어울리지 않아. 억지로 붙여도 말이 안 돼. ‘이런 개 같은’과 ‘이런 고양이 같은’이 같아? 심지어 ‘고양이 같은’은 칭찬처럼 들리잖아. 그런데 아빠 양반이 뭐라는 줄 알어? 고양이가 세 글자라서 욕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고양이가 아니라 ‘고’였다면 욕 앞에 썼다면서. 강아지를 욕 앞에 쓰지 않는 이유와 같다네. 그게 어떻게 같냐고! 완전 미쳤어. 야옹.
홈쇼핑 새로운 종이 상자를 맞이할 때면 늘 행복해. 밖에서 묻어온 다채로운 냄새는 상상력을 자극하지. 몸에 딱 맞춘 듯한 상자라면 더할나위 없는 안락을 느껴. 마음에 드는 상자 안에서는 반나절을 누워 있기도 해. 그러니까 아빠 양반, 엄마의 홈쇼핑은 평화며 사랑이야. 시비 걸지 말라고. 야옹.
착각 배를 드러내고 눕는다는 것은 나는 공격하지 않을 테니 너도 겁먹지 말고 다가와도 된다는 뜻이야. 온몸으로 전하는 평화 메시지거든. 아빠 양반이 어찌나 나를 경계하는지 이렇게라도 진심을 전하려고 해. 고양이가 지닌 품위고 아량이지. 그런데 그 깊은 뜻을 모르는 아빠 양반은 자기한테 잘보이려고 애교 떤다 생각하나 봐. 말이 돼? 호의를 베풀면 숙이고 들어온다고 여기나? 인간들은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 교양 없이 말이야. 야옹.
성장 속도 엄마가 야근이라며 집에 일찍 와서 너를 챙겨달라더구나. 그러기로 했다. 엄마가 마음이 놓였는지 메시지로 고급 정보도 보냈단다. ‘집에 치킨 있어요~’ 뭐가 됐든 안주가 있다는 것은 술 마시는 평범한 아빠들에게 복음이지 뭐. 집에 도착하니 역시 치킨이 있더구나. 뼈다구만 한 접시. “학교 마치고 와서 배고파서 먹었어.” 그래, 잘했다. 그나저나 엄마는 네 성장 속도를 도대체 어떻게 계산하는 거냐?
바보 혼자 쉬고 싶은데 껴안기, 자는데 머리 만지기, 괜히 안아 올려서 이리저리 흔들기. 누나라는 꼬맹이 때문에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아. 하도 귀찮게 할 때는 살짝 깨물어 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아빠 양반이 난리를 쳐. 과정도 모르고 눈앞에 펼쳐진 현상만 보면서 결론을 내리는 어리석은 인간 범주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지. 인간들은 아빠 양반 같은 사람을 딸바보라고 하는가 본데, 그냥 바보야. 야옹.
요구 누나는 밥도 주고 간식도 주고 응가도 치우고 털도 빗겨주고 종종 놀아 줘. 기특해서 내가 조금만 따르면 그냥 좋아 죽지. 엄마는 밥과 간식을 사주고 스크레쳐나 장난감 같은 것도 마련해 줘. 가끔 나를 한참 품에 안아 주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거룩한 평화를 느껴. 갸륵한 것은 그런 엄마가 나에게 딱히 요구하는 게 없다는 거야. 아빠 양반? 아침에 일어나면 딱 한 번 머리 쓰다듬는 게 끝이야. 그러면서 들어오지 마, 올라가지 마, 비켜, 물지 마, 하지 마… 요구는 어찌나 많은 지. 사람들이 웃기는 게 주는 것이 없을수록 요구는 많아. 무슨 심보야?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