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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시험 "엄마, 수학 시험을 쳤는데 두 개는 틀린 것 같고 세 개는 세모야." 며칠 뒤 결과를 확인하니 다섯 개 틀렸다더구나. 세모는 무슨, 다 틀린 거지 뭐. 90점 넘게 받을 수 있었다며 엄청 아까워 했다고 들었다. 네 엄마는 그냥 틀렸다고 하면 될 것을 세모라 했다고 피식 웃더라. 이상한 자존심이 있다며. 아빠는 어쩐지 네 마음이 이해가 됐어. "예지, 수학 80점 넘게 받았다며? 확실히 아는 건데 틀렸지?""아! 진짜 아까웠어. 백퍼 아는 문제인데. 그런데 아는 거 틀렸는지 어떻게 알았어?" 이 바닥이 다 그렇단다.
호기심 나는 아빠 양반이 주름이 늘어도, 성질머리가 나빠져도, 교양이 좀 없어도 괜찮아. 하지만, 호기심만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호기심은 삶을 윤택하게 해. 생물이 살아 있다는 증거지. 호기심은 내 기준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게 아니야. 세계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시작해. 그나저나 아빠 양반, 이거 문좀 잘 열리게 하면 안 될까. 야옹.
평범 화장실 모래가 충분하다는 거, 밥그릇이 차 있고 마실 물이 깨끗하다는 거. 엄마가 안아 주고, 누나가 털을 빗겨 준다는 거. 아빠 양반이 그래도 하루에 딱 한 번은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거. 오후에 거실로 쏟아지는 햇살. 한밤 중에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이 모든 일상에 담긴 소중함을 평범한 고양이는 잘 알아. 하지만, 제법 자신이 특별하다고 우기는 인간들은 평범에 담긴 비범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비범만 좇다가 평범을 잃는 일이 허다하지. 일상에 쫓겨 사색하지 않기 때문일까? 야옹.
영역 이 방이야. 내가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접수해야 할 영역이지. 언제부터인가 내가 이 방문을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게 되자 아빠 양반은 문고리를 바꾸더군. 알레르기 때문에 이 방만큼은 내 털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나? 핑계일 뿐이고 병약한 수컷들이나 하는 비겁한 행위라고 생각해. 늘 그렇잖아. 인간들은 그저 무섭고 두려울 뿐이면서 그럴싸한 핑계로 자기를 보호하더라고. 못난 자신을 좀처럼 인정할 줄 모르지. 그 연약함이 안타까워. 야옹.
선행학습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자기 아이는 중학교 과정까지 선행학습을 했는데, 고등학교까지 선행학습을 하는 친구도 있어 좌절감을 느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단다. 좌절감이라. "예지, 선행학습 하는 거 있어?""선행학습?""지금 4학년 2학기니까 5학년 과정을 배운다던가.""아! 수학 5학년 1학기 시작했어." 좌절감보다 더한 게 뭐가 있나?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단다. "선행학습 시키는 부모들 결정도 존중해. 선행학습을 시키는 이유도 있고 안 시키는 이유도 있겠지. 그냥 교육은 늘 어려운 것 같아. 답이 정해진 것도 없고. 잘 관찰하고 고민하고 거들고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아이와 어른이 같이 자라는 거지."
작명 누나가 식빵자세, 식빵자세 하길래 뭔가 했어. 참나 어이없더군. 상식적으로 고양이가 먼저야 빵, 그것도 식빵이 먼저야? 인간이 빵을 먹은 기간이라 해봤자 고대 이집트로 잡아도 몇천 년, 식빵은 기껏 1900년대부터 먹었다고. 그러니까 고결하고 우아하며 유서 깊은 고양이 자태를 식빵 따위에 비유할 게 아니라, 그 구운 반죽 덩어리를 ‘고양이빵’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하지. 인간들에게 작명 감각까지 기대하지 않는데, 우리 예의는 갖추자고. 야옹.
공감 혼자 있던 집에 누나라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주 세심하게 관찰하게 돼. 구겨진 옷, 젖은 등, 붉은 볼을 보며 오늘 밖에서 좀 뛰어 놀았다는 것을 알지. 약간 튀어나온 입술, 쿵쿵거리는 걸음, 내려 깐 눈을 보며 속상한 일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 그럴 때면 살짝 몸을 기대거나 꼬리로 훑으며 달래 줘. 공감은 고양이가 지닌 미덕이거든. 인간은 공감을 뭐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 시작은 섬세한 관찰이야. 그런 점에서 아빠 양반이 딸에게 공감한답시고 오늘 무슨 일 있었냐고 계속 묻는 꼴을 보면 아주 한심하기 짝이 없어. 야옹.
위선 하루는 아빠 양반이 집에 갇혀 사료만 먹어야 하는 내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더군. 자연스럽지 않다나?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밖에서 생쥐나 참새를 물어와서 먹어 봐. 아빠 양반은 질겁하며 함께 살지 않는다에 내 왼쪽 수염과 전 사료를 걸어. 반면 엄마는 말없이 건식 사료와 습식 간식, 때로는 과일 조각도 챙겨 줘. 그나마 줄 게 이 정도라며. 그러니까 사랑은 머리 굴리면서 멘트 치며 뻥카 날리는 게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해. 아빠 양반 말은 위선이지 뭐.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