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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어쩌자고 털을 버리고 번거로운 옷을 택했는지는 잘 모르겠어. 도도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내 회색빛 털은 한여름에 벗지 않아도 되고 한겨울에 껴입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엄마가 밤에 기온이 좀 떨어졌다고 모포를 덮어주는 것은 좀 오버지. 그래도 가만 있는 이유는 모포보다 더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야. 아빠 양반에게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심성이거든. 그러니까 아빠 양반, 새옷 사이즈 확인하자 하면 군소리 말고 좀 입어. 귀찮아 말고, 투덜거리지 말고. 철없어 보이니까. 야옹.
행복 가족이라는 인간들이 밖에 나가고 없는 동안 일정 시간 거실로 들어오는 볕이 참 좋아. 이 사치를 항상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욱 좋지. 인간들은 무엇이든 충분히 누릴 때부터 행복이 시작되는 줄 아는가 봐. 당연히 그렇지 않거든. 행복은 결핍과 충만 사이 적당한 지점에 존재하더라고. 그러니까 아빠 양반, 월세 산다고 너무 힘겨워 마. 야옹.
덩치값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한 근거로 지성을 내세우는 게 좀 우스워. 게다가 그 지성으로 만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 내가 보기에 인간이 그나마 내세울 경쟁력은 덩치야. 당장 누나라는 저 꼬맹이도 나보다 훨씬 크잖아. 나보다 점프도 못하고 느리면서 덩치는 커. 엄마와 아빠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에 사는 생물 가운데 인간보다 큰 종족은 10%도 안 돼. 그러니까 아빠 양반, 더욱 공부하고 사색하고 성찰하라고. 겨우 덩치값이나 할지 걱정이니까. 야옹.
잘 맞았던 청바지가 꽉 끼인다며 끙끙거리더구나. 앉았다 일어섰다 몇번 하면서 불편해 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그래도 그런 불편 속에서 장점을 찾을 수 있어야겠지. “예지, 핏이 사네.”“핏? 핏이고 자시고!” 바지를 벗어 던지더구나. 그래, 핏이고 자시고! 어쩐지 후련했단다.
언어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고양이는 인간들이 하는 그 복잡한 언어를 대부분 알아들어. 물론 글자를 안다는 것은 아니야. 음량, 진동, 표정, 몸짓을 축적한 경험으로 아주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거지. 그래, 너네 말로 빅데이터라고 하면 되겠네. 그런 점에서 엄마가 쉬라 했다고 쉬고 자빠진 아빠 양반은 글자만 알지 언어를 좀처럼 몰라. 하기야 내가 아빠 양반에게 전하는 그 수많은 표현을 ‘냥냥냥’으로만 알아듣는 센스로 뭘 하겠어. 야옹.
자숙 며칠 만에 만난 엄마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좀 세게 물어버렸어. 상처가 날 정도로. 화난 엄마는 덩치만 큰 아빠 양반보다 훨씬 무서운 것 같아. 정말 식겁했거든. 가끔 아빠 양반이 엄마에게 짜증을 내거나 덤빌 때가 있는데 아주 무모해. 얄랑궂은 자존심 좀 세우려나 본데 대체로 결과가 나빠. 잘못했으면서 욕 먹지 않는다고 자존심이 서는 게 아니지. 아빠 양반은 자존심은 인간보다 한참 높지만 잘못하면 바로 자숙할 줄 아는 고양이 태도를 보면서도 좀처럼 배우는 게 없나 봐. 야옹.
추석 아빠 양반 부모 만나러 온 식구가 떠난다고 해. 며칠 동안 이 집을 접수하게 됐어. 워낙 고결한 품성과 자태 덕에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고양이도 당연히 부모가 있어.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안다고 외로움을 원하는 것은 아니야. 아빠 양반은 일년에 한두 번 자식 노릇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핵심은 그 며칠 빼고 자식 노릇을 별로 하지 않는 데 있지. 어쨌든 잘 다녀왔으면 좋겠어. 화장실에 쌓일 응가를 생각하니 벌써 불쾌하거든. 야옹.
핵심 오랜 연을 귀하게 여기고 가꾼 지인들과 잠깐 만나 명절에 앞서 정을 나누고 서로 삶을 북돋는 자리에 나서는 아빠에게 엄마가 묻더구나. “술 마시러 가면서 가방은 왜 들고가?”“지갑, 휴대폰 손에 들고 다니다가 어디 떨굴까 봐.” 뭔가 설명이 부족했니? 네가 다시 묻더구나. “아빠, 가방까지 떨구면?” 역시 핵심은 따로 있더구나. 날카로웠단다. 칭찬 먼저 하고 질문에 답하자면, 엄마에게 뒈질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