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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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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 이 방이야. 내가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접수해야 할 영역이지. 언제부터인가 내가 이 방문을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게 되자 아빠 양반은 문고리를 바꾸더군. 알레르기 때문에 이 방만큼은 내 털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나? 핑계일 뿐이고 병약한 수컷들이나 하는 비겁한 행위라고 생각해. 늘 그렇잖아. 인간들은 그저 무섭고 두려울 뿐이면서 그럴싸한 핑계로 자기를 보호하더라고. 못난 자신을 좀처럼 인정할 줄 모르지. 그 연약함이 안타까워. 야옹.
선행학습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자기 아이는 중학교 과정까지 선행학습을 했는데, 고등학교까지 선행학습을 하는 친구도 있어 좌절감을 느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단다. 좌절감이라. "예지, 선행학습 하는 거 있어?""선행학습?""지금 4학년 2학기니까 5학년 과정을 배운다던가.""아! 수학 5학년 1학기 시작했어." 좌절감보다 더한 게 뭐가 있나?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단다. "선행학습 시키는 부모들 결정도 존중해. 선행학습을 시키는 이유도 있고 안 시키는 이유도 있겠지. 그냥 교육은 늘 어려운 것 같아. 답이 정해진 것도 없고. 잘 관찰하고 고민하고 거들고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아이와 어른이 같이 자라는 거지."
작명 누나가 식빵자세, 식빵자세 하길래 뭔가 했어. 참나 어이없더군. 상식적으로 고양이가 먼저야 빵, 그것도 식빵이 먼저야? 인간이 빵을 먹은 기간이라 해봤자 고대 이집트로 잡아도 몇천 년, 식빵은 기껏 1900년대부터 먹었다고. 그러니까 고결하고 우아하며 유서 깊은 고양이 자태를 식빵 따위에 비유할 게 아니라, 그 구운 반죽 덩어리를 ‘고양이빵’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하지. 인간들에게 작명 감각까지 기대하지 않는데, 우리 예의는 갖추자고. 야옹.
공감 혼자 있던 집에 누나라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주 세심하게 관찰하게 돼. 구겨진 옷, 젖은 등, 붉은 볼을 보며 오늘 밖에서 좀 뛰어 놀았다는 것을 알지. 약간 튀어나온 입술, 쿵쿵거리는 걸음, 내려 깐 눈을 보며 속상한 일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 그럴 때면 살짝 몸을 기대거나 꼬리로 훑으며 달래 줘. 공감은 고양이가 지닌 미덕이거든. 인간은 공감을 뭐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 시작은 섬세한 관찰이야. 그런 점에서 아빠 양반이 딸에게 공감한답시고 오늘 무슨 일 있었냐고 계속 묻는 꼴을 보면 아주 한심하기 짝이 없어. 야옹.
위선 하루는 아빠 양반이 집에 갇혀 사료만 먹어야 하는 내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더군. 자연스럽지 않다나?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밖에서 생쥐나 참새를 물어와서 먹어 봐. 아빠 양반은 질겁하며 함께 살지 않는다에 내 왼쪽 수염과 전 사료를 걸어. 반면 엄마는 말없이 건식 사료와 습식 간식, 때로는 과일 조각도 챙겨 줘. 그나마 줄 게 이 정도라며. 그러니까 사랑은 머리 굴리면서 멘트 치며 뻥카 날리는 게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해. 아빠 양반 말은 위선이지 뭐. 야옹.
욕설? "아빠, 우리 반 남자 애들 욕은 아닌데 욕 같은 그런 거 막 한다." 고작 예를 드는 게 2018년이더구나. 꼬마 수컷들이 무척 귀여웠단다. "아빠 그런 거 많이 알아. 전문이야. 예지 친구들 모아서 가르쳐주고 싶네.""진짜?" 이런 식빵, 신발끈, 시베리아 오오츠크, 조카 십팔색깔 크레파스, 써클렌즈, 가족같은… 어땠니? 엄청 큭큭거리더구나. 늘 그렇듯 아빠가 자랑스러웠으면 좋겠다.
누나 저 누나라는 아이는 민첩하지도 않고 높이 뛰지도 못해. 운동능력은 나보다 한참 떨어지지. 스스로 홀로 사색하며 세계를 이해하는 고양이와 달리 쟤는 밖에서 다른 인간과 섞여서 남들에게 배우나 봐. 아빠 양반이 새끼 제대로 키우려면 고양이만큼 홀로 사색하는 시간을 보장해야 해. 그나저나 모든 게 부족한 저 아이가 누나인 이유가 있어. 내 응가를 치우고 간식을 챙겨주거든. 기브 앤 테이크 알지? 야옹.
수신(修身) 아빠 양반이 그러더군. 하늘이는 '수신' 하나는 확실하다나? 항상 몸을 핥고 닦으며 맵시를 내는 게 중요 일과니 뭐. 사실 고양이만큼 수신에 성실한 생물도 없지. 그나저나 아빠 양반은 내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같은 말도 모르는 줄 아나 봐. 저 쉬운 말조차 이해 못하는 쪽은 인간인데. 아빠 양반만 봐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막 평해. 나라 일에 치를 떨고 나서 집안일을 하지. 마지막에 가까스로 씻더라고. 그러니까 '평천하치국제가수신'이잖아.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 뭐가 중요한지 전혀 몰라. 아주 한심해.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