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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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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얼마나 훌륭한가. 나는 한밤 중에 별을 보며 생명과 우주가 교감하는 그 고요를 즐겨. 사고는 한없이 뻗어나가고 깊어지지. 그런데 저 인간이라는 것들은 그 소중한 시간에 잠을 퍼 자. 가끔 나만 알 수밖에 없는 그 즐거움을 기꺼이 나누고자 방문을 두드리면 아빠 양반은 오히려 자라고 역정이야. 미쳤나 봐.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어. 더 어이 없는 것은 잠들기 더할나위 없이 좋은 햇살이 들어올 때부터 이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거지. 정작 잠들어야 할 시간에 말이야. 무슨 생체리듬이 그 따위인지 모르겠어. 인간이 아무리 기를 써도 고양이만큼 성숙할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해. 자야 할 시간에 움직이고 사색할 시간에는 퍼 자고 있으니. 야옹.
교양 아빠 양반이 오늘 아침 유난스럽게 클래식 음악을 튼다. 물론 클래식은 고결한 내 성품에 딱 맞는 취향이야. 그런데 고양이가 지닌 고결한 품성 따위는 개 취급(이거 진짜 최악이다)하는 아빠가 내 취향에 맞추다니. 의자에 앉아서 생각하는 꼴을 보니 뭔가 고민이 있어 보여. 그렇다고 아빠 양반이 국내 미디어 환경에서 지역신문이 나가야 할 길이라거나, 북미 긴장(같은)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취해야 할 스탠스, 탈원전 에너지 운동이 가야 할 방향 등을 고민할 리 없잖아. 딱 보니 아침 설거지가 많다고 궁시렁거리네. 그러면 그렇지 참 한심해. 교양을 기초부러 가르칠 수도 없고. 야옹.
감수성 나도 인간이면 피아노 친다. 발가락이 이 모양이니 연주는 할 수 없고 그저 피아노 위에 기대는 것으로 음악적 감수성을 달랠 뿐인데, 저 아빠 양반은 보자 마자 내려오란다. 털 치우기 귀찮다고. 아주 교양머리가 근본부터 되먹지 않았어. 야옹.
의문 아빠 양반은 내가 의자에서 좀 쉬면 물뿌리개를 뿌려. 내가 물벼락 맞는 건 못 견디거든. 도무지 고양이를 섬기는 자세가 안 돼 있어. 근본부터 글러먹었지. 반면 우리 엄마는 내가 의자에서 쉬면 이렇게 쿠션을 받쳐 줘. 어떻게 저 아빠라는 수컷이 엄마같은 분을 만났는지 모르겠어. 야옹.
귀가 아빠 양반이 새벽에 들어오길래 반겨줬더니 화들짝 놀라네. 여튼 아빠 양반은 어떻게 성장했는지 생명에 대한 기본 예의가 없어. 언제쯤 정신 차릴까. 야옹.
교감 아빠 양반은 좀처럼 교감이란 것을 몰라. 엄마처럼 안아 주지도 않고, 누나처럼 간식을 주지도 않지. 식탁에 올라온다고, 방에 들어온다고, 이뻐서 살짝 깨물었을 뿐인데 하늘이 이놈 어쩌고 저쩌고 야단법석이야. 기침 좀 하면 어때서 내 우아한 털이 날리면 천식이 뭐 어떻다며 난리더라고. 그래도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아침에 쓰다듬어 주지도 않기에 살짝 기댔어. 더 달라붙으면 또 질겁하니까. 아빠 양반이 내 마음과 온기를 느꼈으면 좋겠네. 야옹.
모델? 너희들은 밤에 자잖아. 나는 낮에 잔다고. 왜 아침부터 폰을 들이대며 여기 봐라 저기 봐라 난리야? 아빠양반은 옆 모습 찍고 싶으면 자기가 움직이던가. 성질 같아서는 얼굴을 확 긁고 싶다만 내가 또 평화주의자니 어쩌겠어. 참아야지. 뭐? 그래, 그래, 그래? 이 자세라고? 젠장! 김치!
자책 뭔가 켕기는 게 있었니? 뭐라 우물우물하는데 도저히 못알아 듣겠더구나.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단다. "예지, 우물우물하지 말고 평소 얘기하듯이 얘기해. 못 알아듣겠어!" 진짜 자애롭고 꼼꼼한 엄마가 아빠 마음을 조곤조곤 설명해주더구나. 그저 네가 당당하게 얘기했으면 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늘 그렇지는 않더라. 스스로 탓할 일을 너에게 떠넘겼다 싶어 마음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