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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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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절제는 고양이라면 타고난 소양이야. 우리는 그릇에 밥을 많이 담아둔다고 배터지도록 처먹지 않아. 적당히 허기를 채우면 식사를 그칠 줄 알지. 인간은 가진 것은 하찮게 여기고 갖지 못한 것에는 집착하는 것 같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또 환장하지. 아빠 양반이 모니터를 보면서 비싼 차를 뒤적거리는 거 보면 참 한심해. 그나저나 아빠 양반, 여기 공 좀 꺼내 봐. 이게 왜 가질 수 없게 돼 있나. 성질 나게. 야옹.
욕설 한심한 인간들이 그나마 상식은 있구나 싶을 때가 욕 앞에 멍멍이를 붙일 때지. 품위, 교양, 자태 뭘 따져도 고양이는 욕과 어울리지 않아. 억지로 붙여도 말이 안 돼. ‘이런 개 같은’과 ‘이런 고양이 같은’이 같아? 심지어 ‘고양이 같은’은 칭찬처럼 들리잖아. 그런데 아빠 양반이 뭐라는 줄 알어? 고양이가 세 글자라서 욕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고양이가 아니라 ‘고’였다면 욕 앞에 썼다면서. 강아지를 욕 앞에 쓰지 않는 이유와 같다네. 그게 어떻게 같냐고! 완전 미쳤어. 야옹.
홈쇼핑 새로운 종이 상자를 맞이할 때면 늘 행복해. 밖에서 묻어온 다채로운 냄새는 상상력을 자극하지. 몸에 딱 맞춘 듯한 상자라면 더할나위 없는 안락을 느껴. 마음에 드는 상자 안에서는 반나절을 누워 있기도 해. 그러니까 아빠 양반, 엄마의 홈쇼핑은 평화며 사랑이야. 시비 걸지 말라고. 야옹.
착각 배를 드러내고 눕는다는 것은 나는 공격하지 않을 테니 너도 겁먹지 말고 다가와도 된다는 뜻이야. 온몸으로 전하는 평화 메시지거든. 아빠 양반이 어찌나 나를 경계하는지 이렇게라도 진심을 전하려고 해. 고양이가 지닌 품위고 아량이지. 그런데 그 깊은 뜻을 모르는 아빠 양반은 자기한테 잘보이려고 애교 떤다 생각하나 봐. 말이 돼? 호의를 베풀면 숙이고 들어온다고 여기나? 인간들은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 교양 없이 말이야. 야옹.
바보 혼자 쉬고 싶은데 껴안기, 자는데 머리 만지기, 괜히 안아 올려서 이리저리 흔들기. 누나라는 꼬맹이 때문에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아. 하도 귀찮게 할 때는 살짝 깨물어 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아빠 양반이 난리를 쳐. 과정도 모르고 눈앞에 펼쳐진 현상만 보면서 결론을 내리는 어리석은 인간 범주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지. 인간들은 아빠 양반 같은 사람을 딸바보라고 하는가 본데, 그냥 바보야. 야옹.
요구 누나는 밥도 주고 간식도 주고 응가도 치우고 털도 빗겨주고 종종 놀아 줘. 기특해서 내가 조금만 따르면 그냥 좋아 죽지. 엄마는 밥과 간식을 사주고 스크레쳐나 장난감 같은 것도 마련해 줘. 가끔 나를 한참 품에 안아 주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거룩한 평화를 느껴. 갸륵한 것은 그런 엄마가 나에게 딱히 요구하는 게 없다는 거야. 아빠 양반? 아침에 일어나면 딱 한 번 머리 쓰다듬는 게 끝이야. 그러면서 들어오지 마, 올라가지 마, 비켜, 물지 마, 하지 마… 요구는 어찌나 많은 지. 사람들이 웃기는 게 주는 것이 없을수록 요구는 많아. 무슨 심보야? 야옹.
호기심 나는 아빠 양반이 주름이 늘어도, 성질머리가 나빠져도, 교양이 좀 없어도 괜찮아. 하지만, 호기심만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호기심은 삶을 윤택하게 해. 생물이 살아 있다는 증거지. 호기심은 내 기준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게 아니야. 세계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시작해. 그나저나 아빠 양반, 이거 문좀 잘 열리게 하면 안 될까. 야옹.
평범 화장실 모래가 충분하다는 거, 밥그릇이 차 있고 마실 물이 깨끗하다는 거. 엄마가 안아 주고, 누나가 털을 빗겨 준다는 거. 아빠 양반이 그래도 하루에 딱 한 번은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거. 오후에 거실로 쏟아지는 햇살. 한밤 중에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이 모든 일상에 담긴 소중함을 평범한 고양이는 잘 알아. 하지만, 제법 자신이 특별하다고 우기는 인간들은 평범에 담긴 비범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비범만 좇다가 평범을 잃는 일이 허다하지. 일상에 쫓겨 사색하지 않기 때문일까? 야옹.